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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Sep 29. 2021

대화, 실존적 만남의 장

대화가 필요해

대화가 필요해


  수업자의 성찰지를 분석하는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성찰지였는데, “미술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은 학급입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선생님이 수업을 공개한 반이 미술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 자존감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같은 성찰지를 분석하신 선생님께서는 수업을 공개하지 않은 반 학생들이 미술 과목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읽어내셨다.


  같은 성찰지를 보는데도 이렇게 해석이 다르다니! 내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해서 만든 의미가 항상 옳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은, 수업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란 것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대화(對話):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


 대화는 독백이 아니라, 나와 타자가 함께 만나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래서 수업안을 읽고 수업을 참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수업자와 수업친구가 함께 이야기를 한다. 피상적인 고민을 파고들어, 진짜 고민인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간다.     



예수님의 대화법            


요한복음 5장 5-9절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라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서른여덟 해 된 병자,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같은 병으로 고생해 온 마음이 어땠을까? 사실 교실 속에서의 문제도 가벼운 것에서부터 무거운 것까지 다양하다. 어떤 문제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상처와 쓴 뿌리와 얽혀있어 쉽게 건드리기가 어렵다.


 서른여덟 해 앓은 병자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낙담을 안은 채로, 예수님께 자신의 상황을 호소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화 속에서 본질을 짚으시며, 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사람들의 필요를 바로 아시고, 처방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타인의 마음과 본질적인 필요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물며, 내 마음도 내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어찌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탐색한다. 수업 속에서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혹시나 그것과 관련된 아픈 경험은 없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셔야만 했는지를 조심스럽게 찾아간다. 대화의 과정 가운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딱딱한 껍질 속에 숨겨진 보드랍디 보드라운 선생님의 내면을 만나기 위해선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내가 너를 바라보는 시선은            


왼손

                    - 도종환


말 없는 왼손으로

쓰러진 오른손을 가만히 잡아주며

잠드는 밤

오늘도 애썼다고

가파른 순간순간을

잘 건너왔다고

제 손으로 지그시 잡아주는

적막한 밤

어둠 속에서

눈물 한 방울이 깜빡깜빡

그걸 지켜보는 밤



  수업 나눔을 할 때에 ‘질문’, ‘대화법’이 중요하다며 여러 질문과 대화법을 익히지만, 전제되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태도이다. 내 잣대로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선생님의 존재를 향한 따스한 시선이다.


  가파른 순간순간을 잘 건너오며 애쓴 오른손을 위로할 때에, 왼손은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다.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 질문은 접어둔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말없이 쓰러진 오른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것이다.


  가파른 순간을 건너온 게 비단 오른손만이랴?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가파른 순간을 만나는가? 수많은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산더미 같은 일들을 해내는 교사의 삶이다. 게다가 교사는 가르치는 일이기에, 학생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해야 한다. 까다로운 학부모를 다루어야 하고, 학생 간의 첨예한 갈등을 중재해야 한다. 사회의 아픔이, 가정의 아픔이, 학생들을 매개로 가시가 되어 교사의 마음에 박히면, 교사는 그 가시를 안고 버텨내야 한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의 성장을 돕고자 애쓴 선생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수업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오늘도 애썼다고, 가파른 순간순간을 잘 건너왔다고’ 따뜻한 시선으로 마음을 안아 드리는, 눈물방울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수업 나눔이 되면 좋겠다.     



  존재와 존재가 만난다는 것은


 수업 나눔 대화는 수업자와 수업친구가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 진솔한 대화를 하는 열린 과정이다. 내 마음을 열고 타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와 너의 존재가 접촉하면서, 연결되고 관계를 맺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 얘길 하자면, 난 어린 시절부터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왔다. 부모님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고, 사회에서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고, 미움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교사를 하자니 쉽지 않았다. 특히 학생들 간 갈등을 조율하는 게 힘들고, 훈육이 힘들었다.


  교사가 되고 난 후, 내가 안고 있었던 질문은 ‘교사가 내 적성에 맞는가?’였다. 동료 선생님들께 “더 노력하면 잘할 수 있겠죠?”라고 물으며 교사로서의 나의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애썼다. 순간순간 좌절스런 순간에 부딪히면 ‘아, 교사란 직업과 나는 안 맞는가 봐’라며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수업 나눔을 할 때에 여러 수업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내가 오랜 시간 씨름해 온 ‘교사의 적성’에 관한 의문을 알아차리고 공감해 주신 선생님 앞에서 내 마음이 무장해제되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날 있는 그대로 판단이나 평가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고민의 지점에 함께 머물러 주신 선생님 앞에서 마음이 열렸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직도 질문에 대한 답을 다 찾지는 못했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질문이 내 마음 문을 두드리는 빈도는 줄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을 자책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연약함을 극복해 나간 것에는, 날 존재로 바라보고 만나준 수업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 힘으로, 동료 선생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내가 경험한 작은 온기를 나누고 있다.  

   

       


그대도 오늘

                            - 이 휜


무한히 낙담하고

자책하는 그대여,

끝없이 자신의 쓸모를

자문하는 영혼이여,


고갤 들어라.


그대도 오늘

누군가에게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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