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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Dec 01. 2021

공감이 공감이 되려면

수업코칭, 수업나눔

상처 받은 심장에게 공감하는 영혼보다 더 좋은 위로는 없다. - 고트프리트 켈러

 

격려에 앞서 공감이 필요해

  수업 나눔 격려 단계였다. 수업자의 성찰지에 쓰인 고민과 달리, 실제 수업에서 선생님은 수업을 너무나도 매끄럽게 잘 이어가셨다.

  “선생님 수업을 봤더니 중복 발문도 없었고, 발문 하나하나가 아이들 생각하게 하는 발문을 던지시더라고요. 5분 30초에, OO를 격려하시면서 수업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하시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나 이러한 격려는 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선생님의 고민을 부정하는 칭찬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격려에 나도 모르는 평가적 시선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일까? ‘발문을 잘하신다.’는 생각도 어쩌면 나의 평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격려 단계에서는 ‘수업자의 신념’이 잘 드러난 장면을 찾았어야 했는데, 나는 내가 보기에 좋았던 장면을 찾은 것이다. 어쩌면 나의 주관이 강하게 나타났을 수 있다. 그래서 수업자에게도 칭찬이 불편함으로 다가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려에 앞서 공감이 필요하고, 수업자의 시선으로 수업을 봐야 하는데 나는 나의 시선으로, 나의 경험으로 수업자의 수업을 봤던 것이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니... 공감을 놓친 격려는 수업자에게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었다.


공감하는 게 왜 어렵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도 바쁘다. 학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계속해서 요구와 의무를 수행하는데 쫓긴다. 학생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심지어 화장실 갈 시간도 내기 어려울 때도 많다. 오후에는 학교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쁘다. 이렇게 바쁜 스케줄 가운데 동료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더 고립되고, 외로운지 모르겠다. SNS에서는 공감하기가 참 쉽다. ‘공감’ 버튼을 누르면 된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타인을 공감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나는 왜 공감이 어려운지 고민이 되었다. 공감이 도대체 무엇인지 개념을 재정립하고자 사전을 찾아봤다. 먼저 한자어에 눈길이 공감(共感)의 한자어를 살펴보니 한 가지 공에 느낄 감, 즉 같이 느끼는 것이었다.

  ‘공감’의 개념은 Vischer이 1873년 독일어  ‘einfühlung(ein:안에, ‘fühlung:느끼다)’를 미학 분야에서 공감의 개념으로 처음 사용함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박성희, 2004). Vischer은 예술 작품을 볼 때, 작품의 아름다움의 내면에 닿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현대의 공감 또한 타인의 내면, 타인의 감정, 그리고 타인의 아름다운 영혼, 존재에 닿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 후, Lipps(1903)는 지각된 대상에 자신을 투사하는 개념으로 공감을 설명하였고, Titchner(1909)는 공감(empathy)란 용어를 정립한다. 접두어 ‘em’은 안으로(in, into)의 뜻이라면 ‘-pathy’는 희랍어 ‘pathos’의 뜻으로 ‘passion’도 ‘pathos’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empathy는 고통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웅덩이에 사람이 빠져 있다면 웅덩이에 들어가 고통받는 사람을 안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공감이다(권수영, 2020).

 그런데  여전히 작품에도, 역사적 인물에도,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동료에게도 공감의 마음을 보내는 것이  어려울까? 상상력의 부족일까? 경험의 부족일까? 아니면 타고난 능력이 없는 것일까? 내가 공감을 서툴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아파하는  같은데  그럴까?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다 보니, 나의 문제는 빠른 문제 해결에 대한 조바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작품이나 역사적 인물을 깊이 공감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구나. 사랑하는 동생이 마음이 힘들 , 공감하기보다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려고 어설픈 조언을 하다 “됐어. 끊어.” 하는 동생의 냉담한 수화기 소리에 마음 아팠던 것이 나의 공감 부족이었구나. 수업자가 수업  고민으로 어려워할 , 어쭙잖은  생각으로 수업자의 당위를 알아차릴  있도록 도와주려다 저항에 부딪혔던 것도 나에게 답이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착각이었구나. 신속한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면 공감에서 멀어지는데,  내가 해결할  없는 문제를 해결할  있다고 착각하고 공감 대신 조언을 남발했던 것이다. 내가 공감을  주기만 해도,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는데도 말이다.


공감, 어떻게 하지?

  정혜신 박사는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pp. 252-253).”라고 한다.

  먼저는 공감이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얻게 된다는 메시지에 마음이 놓였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정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내면의 조각들을 찬찬히 모아 전체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인내였던 것 같다. 조심스레 수업자의 마음에 다가서도록 한발 한발 내디뎌야 했는데, 난 급한 마음에 수업자의 마음에 내 생각을 강요했다. 수업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기보다는, 수업나눔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던 것 같다.

  공감을 위해 여러 상담기법을 찾아봤지만, 실제로 수업나눔을 할 때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업자의 알아차림을 돕기보다는, 수업 안내자를 하며 ‘수업자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 수업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어떻게 질문을 하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등의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 보니 수업자의 말을 깊이 이해하기보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데 시간을 써 버렸다. 불안한 상태에서 수업나눔을 진행했고, 수업자에 대한 통찰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어떤 유능한 상담기법보다 공감하는 마음이었는데, 난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난 전문적인 상담가가 아닐지라도, 교실 현장에서 부대낀 경험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이야기에 같이 울고 웃어줄 수 있음에도, 나는 수업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만 앞섰지, 수업자의 마음에 충분히 머무르지 못했다. 수업자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다. 수업자의 존재에 주목해줬어야 했는데, 나는 수박 겉핡기만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발문, 화려한 수업기술, 경력 등의 여러 요소를 보기 전에 먼저 선생님 존재를 봤어야 했는데…. 나는 선생님의 보여지는 부분만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칭찬했고, 그런 칭찬은 선생님의 존재에게 다가가기에 역부족이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려면

  어린 왕자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마음을 얻는 일이 어렵기에 공감이 쉽지는 않지만, 수업자의 존재에 온전히 관심을 가지고 다가갈 때 공감의 문이 열리는 것 같다.

  수업자의 마음이 나타난 성찰지를 꼼꼼히 읽어보면서 그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일, 수업장면을 관찰하며 수업자가 생각했을 그 마음과 느낌을 헤아려 보는 일,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수업자의 말을 깊이 이해하고 따라가는 일.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수업자의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과 환대가 아닌지 싶다.

 무엇보다 나의 생각을 괄호 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했던 수업나눔을 돌이켜 보니, 내가 경험했던 것이 수업자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나의 아픔과 수업자의 아픔이 결이 다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했다. 나도 내 마음 알기가 힘든데, 어떻게 타인의 마음과 삶 속의 경험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이 때로는 수업자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괄호 속에 넣어둔다. 진정한 공감을 위해, 수업자의 말에 마음을 열고 귀를 연다. 선배 선생님께서 내 마음을 알아주셨을 때, 내 마음이 무장해제된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따뜻한 공감을 선물로 주며 수업 성찰의 길을 동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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