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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Jul 30. 2023

피하고 싶은, 피할 수 없는

교사라는 두 글자

“우리 딸이 선생님이에요.”

엄마는 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내 속도 모르고.’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교실에서 얼마나 힘든지 엄마는 알까? 생전 처음 보는 내 욕이 버젓이 책상에 적혀있었다. ‘OOO, XX년.’ 수업 시간, 판서를 할 때면 짓궂은, 아니 못된 남학생들이 내 등 뒤에서 손가락 욕을 해댔다. 그 당시 내가 맡았던 학급은 남학생들은 폭력, 여학생들은 따돌림으로 생활도, 수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 OO가 화장실에서 죽겠다며 커터칼을 가지고 갔어요.”

“뭐?”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가서 그 학생을 말렸다. 학급 학생들에게는 OO이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친구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OO이를 극도로 싫어하던 여학생들이 다음날, 손목에 손수건을 하고 왔다.

“OO야, 왜 손수건을 하고 왔어?” 하고 손목을 확인하고는 난 할 말을 잃었다.

“선생님, OO이만 힘든 거 아니에요. 우리도 힘들다고요.”

그렇게 난 무능한 교사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붕괴된 교실, 그 교실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심한 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생활지도도, 업무도 서툰 24살의 나는 나의 존재의 이유를 여러 번 되물었다. 이렇게 무능한 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학생들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우리 반의 엄석대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학생들을 휘어잡았고, 수업을 방해했다. 남자아이들은 엄석대의 권력에 복종했고, 내 말은 휴지장처럼 가벼웠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을 때는 다툼이나 사고가 나기도 했다. 난 생각했다. ‘수업이 재미없어서 그런 걸까? 수업을 재미있게 하면 아이들이 집중해서 문제행동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선생님들이 기피하던 소규모 학교, 학생들은 거칠었고, 업무는 심각하게 많았다. 업무에 서툴렀기에, 일하다 보면 밤 11시가 넘었고 버스는 끊겨 있었다. 가끔씩 당직 선생님이 술에 취해 교실로 찾아와 나에게 호통을 치셨다.

 “선생님은 왜 자기 생각만 하소? 왜 그리 이기적이요?”

 “정말 죄송합니다.”

얼른 짐을 챙겨 학교를 빠져나온다. 어두운 밤길을 미친 듯이 달리며 자취방에 도착했다. 새벽 2시까지 다음날 수업 준비를 하다가 잠들었다. 그러나 새벽까지 눈을 비비며 준비한 수업을 교실 속에서, 나의 애씀은 물거품이 되곤 했다. 학생들이 집중을 해야지 말이다. 자기들끼리 낄낄대었고, 장난치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수업 준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마저 안 된다면, 교실이 무너질 것 같았다. 하루는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고구마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두고 수업준비를 했다. 그러다 스르르 잠에 들었고,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4시였다. 홀로 지내던 자취방은 연기가 자욱했고,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얼른 가스불을 껐다. 살아있음에 감사했고, 살아있음에 슬펐다. 다시, 이 지옥 같은 괴로운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가?

지난 7월 신규 2년 차 선생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나 또한 신규 2년 차에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기에 남의 일 같지 않았다. 14년 전과 비교하여, 학교는 상상도 못 할 만큼 훨씬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정당한 훈육이 아동학대가 되어버렸고, 교사들은 학생들의 폭력을 제지할 수도 없는, 교사를 때리는 학생 앞에서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법적 구조 속에서 살고 있었다, 학부모의 막말과 시도 때도 없는 민원 앞에 속수무책인 학교 현장이었다.

난 내 역량을 계발하면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생활지도를 잘하면, 수업을 잘하면, 학생들과 학부모가 날 존중해 줄 줄 알았다. 온갖 연수를 찾아다녔고,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며 젊음을 불태웠다. 몸을 혹사할지언정, 무능한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고, 나에게 남은 건 젊을 적 과로로 인해 여기저기 아픈 몸과, 한층 더 어려워진 교육 현실이다. 난 정치인들이, 교육관계자들이 문제 해결의 방편으로 ‘교사 연수’를 들 때 콧방귀를 뀐다. ‘당신들이 연수 듣고 현장에서 일해 보세요.’

‘교사’라는 말에 이제는 지친다. ‘OOO XX년’을 지우개로 지웠듯, ‘교사’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고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교육 시스템에 분노한다. 고통받는 수많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애통해한다. 왜 우리는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 속에서 ‘교사’로 살아야 하는가? 이제는 제발, 교사 역량 계발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삼지 않길 바란다. 교사는 성직이니 네가 다 감싸고 감당하라고 말하지 말길 바란다. 아무런 법적 보호도 없는 상태에서, 교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구조 속에서 수많은 책임을 강요하지 말길 바란다. (네가 한번 해보렴.)

    

수업이라는 두 글자

솔직히, 난 수업하는 게 좋다. 수업이 재미있다. 학생들이 즐겁게 학습에 몰입할 때면 희열을 느낀다. 수업 후에, “선생님, 너무 재미있어요,” “배우고 나니 뿌듯해요,” “선생님, 너무너무 사랑해요. 힘내세요.”라는 학생들의 말 한마디에 감동하여 교사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이러한 ‘수업’은 정상적인 교육 환경 속에서만 가능하다.

수업에 관심이 많았기에, 수업코칭연구소에 들어왔다. 좀 더 나은 수업을 하고 싶어, 부끄러운 수업이지만 수업친구에게 공개했다. 수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선생님들의 공감과 격려, 때로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 가운데 성장함을 깨닫고 뿌듯했다. 무엇보다 나를 존재로 바라봐주는 수업나눔의 시선이 좋았다. 선생님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내면을 세워주고자 하는 수업코칭의 철학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내가 위로받았듯이, 나 또한 동료 선생님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내면을 세워드리고 싶었다. 수업 나눔을 하며, 행복한 수업을 꿈꾸며 함께 성장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우리의 ‘수업’을 위한 애씀도 모순된 법적 구조 속에서 얼마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난 뼈저리게 경험했었다. 교실이 무너진 상태에서, 폭력으로 물든 상태에서 수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업이 어려운 상황을 단지 교사의 역량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 지면을 빌어서 두 가지 제안을 해 본다. 첫째, 법과 제도의 보완 및 개정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수업이 어려운 근본적 이유 중 하나는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이 용인되는 법과 교육적 시스템이다. 가장 먼저는 교사의 기본적인 생활지도마저도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놓은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은 필수적이며, 정상적인 교육 환경을 영위할 수 있도록 여러 법과 제도의 개정 및 행·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둘째, 학부모의 무분별한 민원, 특히 교사의 인격을 모독하는 악성 민원,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요구로부터 교사를 보호해 줄 필요가 있다. 이런 민원 받이로 감정노동을 할 때면, 교사는 수업을 할 의욕이 꺾일 수밖에 없다. 학교는 보육의 장소가 아니라 교육의 장소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하는 꿈을 안고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하루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아무런 갈등 없이,’ 안전하게 데리고 있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학생 약을 챙겨주고, 학생들이 기분 상하지 않게 학교에서 데리고 있는 것은 교육의 본질이 아니다. 교사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민원 창구를 일원화하고 합당한 민원만 처리할 수 있길 바란다.

수업이 하고 싶은 교사, 배우고 싶은 학생들이 안전한 교실에서 즐겁게 수업할 수 있는 것이 거창한 꿈일까? 교사, 수업이라는 글자가 사라지지 않길 기도한다. 정치인의 당파, 학부모의 이해관계, 학생 인권과 교권 등 이렇게 편 가르기 할 때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아 움직일 때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희망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오늘도 수업하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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