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충분하다

by 햇살샘

고장 난 브레이크

눈병에 걸렸다. 작년 다래끼로 고생했고, 다래끼는 흉터를 남겼다. 그 흉터를 치료해 보겠다고 인터넷에서 다래끼로 유명하다는 서울의 한 병원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그 병원에서는 IPL을 권했고, IPL을 받고 난 뒤 원장님께서 마이봄샘을 짜 주었다.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5일 후부터 오른쪽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일 후, 왼쪽 눈까지 충혈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갔더니, 눈꺼풀 염증에 눈이 충혈되었는데, 이제는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눈이 충혈되고부터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바로, 노트북 작업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여러 일이 쌓여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는데, 도통 화면을 보는 것이 눈이 시큰거리고, 따갑고 고통스러웠다. 또, 화면을 보는 게 눈에 안 좋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병원에 다녀온 후, 교원특별연수 발표자료를 확인했다. 예전에 대충 해 두었던 18쪽가량의 발표자료를 이미 공유문서에 올린 상태였다.

‘충분해. 70%만 만족할 정도로 해도 괜찮아.’

그러나 내 마음 한편에서는 뒷부분이 영 마음에 걸렸다. 급하게 마무리했던 부분이라는 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하다는 마음과 완벽주의의 두 마음이 싸웠고, 결국 내 마음의 심판관은 완벽주의 편을 들어주었다. 나는 컴퓨터에 앉아 발표자료의 뒷부분을 고치기 시작했다. 작업을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고, 눈에 열이 나는 듯 아팠다. 몸이 아파서 쉬라고, 쉬라고 이렇게 항의하고 있는데도, 나는 내 마음의 속도를 멈출 수가 없다. 눈병으로 일을 평소처럼 할 수가 없는 내가 용납이 안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 폭주하는 자동차처럼 쉬지 않고 달리려고 할까?


성실함이라는 함정

교사들은 대부분 학창 시절 매우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 성실함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대로 이어진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지나친 성실함, 완벽주의.

사실 교사라는 직업은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직업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수업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순간들, 예상치 못한 반응들, 흔들리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수업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완벽한 수업을 기대한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길 바란다. 내 수업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배움이 충만하며, 내가 완벽한 교사이길 바란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 완벽한 엄마가 없듯이, 완벽한 교사도 없기 때문이다.

육아를 하는 엄마들이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 엄마일까”라고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자신에 대한 기준이 매우 엄격하고, 한 사람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고난도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사인 우리도 늘 ‘난 부족해’라는 메시지에 시달리곤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족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더 채찍질하고, 더 나은 교사,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니?”

쓸모를 묻는 사회에서, 우리는 일 중심의 삶으로 기울기 쉽다. 그러다 보면, 몸이 주는 신호를 무시한 채,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지나친 성실함, 완벽주의는 우리에게 빛나는 보상을 가져올 것 같지만, 실은 번아웃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내가 그랬다.


일도, 욕망도 팽창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늘 “더, 더, 더”라는 말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더 큰 집, 더 좋은 위치, 더 나은 성과. TV를 켜도, 휴대폰을 열어도, 세상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긴다. 비교는 일상이 되고, 부족함은 기본값이 된다.

그렇다면 학교는 어떨까. 학교라고 예외일까? 학생들은 더 좋은 성적을 위해 경쟁하고, 남을 이겨야 원하는 자리에 갈 수 있다는 메시지 속에서 자란다. 교사는 어떠한가? 교사는 성과주의, 능력주의의 최전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교사는 더 많은 업무, 더 완벽한 전문성을 요구받는다. 여기에 인공지능 시대 디지털 기술이 더해지며 교사는 또다시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장착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 다양한 배경, 다양한 욕구, 다양한 특성을 지닌 학생들을 매일 마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가운데 내 마음속 은밀한, 무의식적 기준은 날 채근한다. ‘모든 학생이 나를 좋아하게 해야 해.’ ‘수업이 재미있어야 해’, ‘동료교사, 관리자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아야 해’, ‘학부모들이 만족하도록 해야 해’, 사실 이러한 기준들은 참 비합리적이고 지나치게 이상적일 때가 많다. 이런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내 존재가 쓸모가 있을 것 같고, 좋은 교사가 될 것 같다.

교사라는 직업의 정체성이 강하다 보면, 집에 와서도 늘 일로 생각이 돌아간다. 일이 집에서도 분리가 되지 않는다. 내 체력을 갈아서라도,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런 반면, 내가 애쓴 것과 달리 보상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번아웃이라는 녀석을 만났고, 지금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3월이다. 학교는 미친 듯이 바쁠 것이다. 여러 업무를 하다 보면 분명 실수할 수도 있다. 다루기 힘든 학생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호의적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감정노동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럴 때, 난 어떻게 날 지키고 돌볼 수 있을까?

“예전엔 능력이 부족해서 학교 일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능력과 경험은 어느 정도 쌓였지만, 체력이 안 되어 학교 일이 힘들어요.”

수업코칭연구소 선생님들과 말할 때, 난 나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지속가능한 교사의 삶을 위해 수업코칭연구소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달아지는 지점이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나와 달리 자신을 돌보는데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예를 들어, 라디오를 듣는다거나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결핍을 예술로 승화시키시는 선생님도 계셨다.

생각해 보면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날 돌보는 일을 등한시할 때가 많았다. 쉴 틈을 내기가 힘들 정도로 일을 많이 벌였고, 그 일들이 날 삼켜버렸다. ‘미술관을 간 적이 언제더라?’, ‘소설책을 읽은 적이 언제더라?’, 내가 좋아하는 예술 활동도 뒤로 미룬 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로 나를 쉼 없이 몰아붙였다.

그런데, 그 마음의 동기는 ‘욕심’이었다. 실은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나 성공에 대한 집착이 지나쳤고, 현실이 그렇지 못함에 반복적으로 좌절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노력하면 어느 정도 꿈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과 현실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고 나는 좌절에 빠졌다.

‘노력의 배신’

내가 찾은 언어였다. 난 내 노력에, 내 삶에 배신감을 느끼고 번아웃에 빠졌던 것이었다. 내가 세웠던 기준, 목표가 ‘꼭 그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 같다. 그전에는 ‘당연히’ 목표를 이뤄야 된다고 쉴 새 없이 나를 채근했었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서고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도 하면서, 이제는 무리한 목표를 내려놓는다.

‘하나님, 제 고집이었습니다.’

이제는, 힘을 빼고, 내가 소소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학교에서도 무리하게 나 자신을 증명하려 하기보다는, 사부작사부작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것에도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동안 세상이 규정한 삶의 방식을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부풀리는 것에서 날 멈춰 세운다. ‘이미 충분해.’ 올해는, 그동안 애쓴 나를 토닥이며, 뭄과 마음을 조금 더 돌보는 해가 되길 바란다. 아마 내면의 완벽주의는 끊임없이 나에게 ‘더, 더, 더’ 하며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그럴 때, 난 다시 다정하게 말해준다.

‘OO아, 넌 이미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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