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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영 Jun 20. 2022

나는 낯가림이 많은 아이였다

내향성-외향성, 사회불안에 대하여

나는 매우 낯가림이 많고 수줍은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낯선 곳에 가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눈도 잘 맞추지 못하고 굳은 표정을 한 채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고 어색하게 ‘있었다’. 편해지면 이따금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칠 줄 알았지만 긴장감을 조금 덜어내고 주변 사람과 환경에 마음을 여는 데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기질적인 요인도 있었던 듯하지만 경제적 어려움, 양육에 대한 무지, 부모님 자신들의 이슈들로 태내기부터 생애 초기 환경 또한 열악했던 것으로 보여, 기질과 환경 중 어느 요인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추측하기 어려울 만큼 어지럽게 뒤섞여 상당히 예민한 성격 발달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어릴 때 얼마나 ‘낯가림’이 많았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6살 어느 무렵, 텔레비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옆으로 흘겨보는 나를 엄마가 안과로 데려간 적이 있다. 그리 나이 들지 않은 남자 의사를 만났고, 시력 문제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시력 검사를 했던 것 같다. 의사는 자극 판이 보이는지 물어왔고, 나는 그저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면 됐다. 그런데 입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곁에서 나를 엄청나게 어르고 달랜 끝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엄마의 귀에 대고 간신히 답을 속삭일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나는 세상을 좀 더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또렷해진 세상을 직시하는 일은 여전히 벅찼다. 엄마는 내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외향성 vs 내향성

외향성-내향성 차원에서 성격을 분류하면 나는 극도로 내향적인 성향이었다. 행동상 낯선 사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상호작용을 하면 외향적 성격, 같은 상황에서 잘 위축되고 수줍음을 겪으면 내향적 성격이라고 한다. 경험과 학습을 통해 겉으로 두드러진 행동 차이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외향적으로 보이는데 알고 보면 본인은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 차분해 보여 내향적인 사람인 줄 알았으나, 멍석이 깔리니 ‘극 E’와 같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행동적 구분이 어렵다면 대인관계 자극 처리에 얼마나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여부로 외향성과 내향성을 나눌 수 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보통 자극이 없으면 다소 지루해한다. 그래서 남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며 놀아야 기분 좋은 흥분을 느끼며 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주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데 이미 많은 에너지를 쓴다. 게다가 남들과 교류하는 일은 더욱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나면 조용한 곳에서 홀로 고요히 재충전하는 시간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관계 욕구가 적은 것은 아니다. 실질적인 상호작용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커서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는 빈도를 제한하는 것일 뿐이다. 대면보다는 비대면(메신저, 이메일)을 더 선호할 수 있다(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상황을 반기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 중 소설, 영화, 드라마 등 관계에 대한 각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대인관계 욕구 자체가 절대 적다고 볼 수는 없다.     



외향성과 내향성 여부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수는 있다. 외향성-내향성을 스펙트럼선 상의 양 끝에 놓고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내향적인 사람이더라도 친숙한 사람을 만나거나 익숙한 환경에서는 좀 더 활발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외향성을 타고난 사람도 경험을 통해 때와 장소를 가려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고, 대인관계 상처가 생겨서 내향적인 사람처럼 변화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회불안(social anxiety)

나는 내향적 성향에 더하여, 정신과적 진단 기준에 따르면 사회적 상호작용이나 무언가를 수행하는 상황에서 높은 수준의 불안을 경험하는 것을 뜻하는 ‘사회불안’ 수준도 매우 높았다. 정신과적 진단의 바이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 등재된 ‘사회불안 장애’는, 장애 여부를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한 경향이 있어 논란이 많은 진단 중 하나이다. 주체성과 자율성,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서구문화권에서는 사회불안 수준이 높으면 굉장히 도드라져 보이고 문제시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집단에 순응하는 것을 요구하고 튀는 걸 꺼리는 집단주의적 문화가 있어서 조용하고 소극적인 행동이 오히려 독려되다 보니 특별히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개인 PR과 브랜딩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기회도 늘어나면서 높은 수준의 사회불안이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것도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 짓기보다는 정도로 표현하는 게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정도가 극심하면 심리적 고통이나 기능적인 제약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을 보면 보통 사회불안 수준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내향성=높은 사회불안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내향적이면서 사회불안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사람이 있다. 외향적이면서도 발표하는 상황과 같이 특정한 상황에서만 사회불안을 겪는 사람도 있다.      


부수적 결과: 부족한 사회성 및 사회기술 

아무튼 극도로 내향적이고 사회불안 수준이 높았던 나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좀 더 나아지기는 했지만 학년이 바뀌는 것과 같이 적응 부담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긴장감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이러한 조합의 사람들은 사회성 발달도 떨어질 확률이 상당히 높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회가 우선 많아야 이런저런 관계 실험을 하면서 사회성을 발달시킬 수 있다. 기회가 있어도 긴장을 덜 해야 자기표현이나 티키타카를 더 시도해보련만, 내향적이면 이런 기회를 잘 안 만들려고 할 뿐만 아니라 기회가 주어져도 활용을 잘 못 한다. 아이와 익숙한 사람이 이러한 아이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불안을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상호작용의 기회를 늘리고 거친 소통 방식을 다듬는 데 도움을 주면 사회성 및 사회기술 발달이 촉진될 수는 있다.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는 그런 기회가 부족했다.


나는 크게 긴장한 상황이 아니어도 사회성 발달의 부족으로 인해 서투른 방식으로 소통하게 되어 학창 시절에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은근한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다. 부정적인 사회적 경험을 하게 되면 안 그래도 상호작용이 어려운데 마음의 벽까지 쌓고 거리를 두게 되니 사회성 발달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사실 나의 경우 높은 수준의 불안과 사회기술 부족 문제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참아 버릇해서 해소하지 못하고 억눌린 감정이 엉뚱한 곳에서 날 서게 표현된다거나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강으로 맞서는 문제도 있었다. 어쨌든 따돌림이 전적으로 내 잘못은 아니었겠으나 서투를 뿐 의도가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또래가 인내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그런 친구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는 초등 6년, 중등 3년 내내 개근을 하며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다가 돌연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겠다는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후, 원래는 2년 뒤에 대학에 가려했으나 2배로 불어난 4년 동안 집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나의 사회성은 더욱 퇴보하였다.      


경험이 주는 이점

나는 나이 드는 게 더 좋다.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온 세월이 쌓이면서 사회적 상호작용이 점점 편해졌기 때문이다. 상담자라는, 사람을 계속 만나는 일을 어찌 됐든 나름대로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표 상황에서 여전히 긴장감이 고조되지만, 가끔은 약간의 긴장감을 기분 좋은 흥분감으로 해석하여 발표력의 연료로 삼는 여유를 부릴 때도 있다. 내향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부정적인 함의를 가진 ‘예민하다’, ‘까다롭다’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보다는 타인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민감한’ 사람으로 개념화하여 외향적인 성향과 다를 뿐, 여러 긍정적인 특성이 많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조망하려는 흐름이 있다. 내향적 성향은 차분하게 숙고하고 예리한 관찰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이 가능하다. 상담자 중에 내향적인 사람이 상당히 많은(사실 거의 대부분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향적인 성향이 선호되고 내향적인 특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한 점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기질과 더불어 오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행동 패턴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만족할 만큼 불편감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불안감이 더욱 심해져서 대인관계를 기피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회기술 또한 마찬가지다.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상호작용 상황에서 어느덧 긴장에서 비롯된 딱딱한 표정을 짓고 가마니가 된 채로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외로워도, 누군가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보다는 관계 맺기의 번거로움이나 불편감이 더 커서, 혹은 나는 전혀 외롭지 않다며 외로움을 사소하게 여기고 관계를 매우 협소하게 유지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면의 관계 욕구를 좌절시키고 사회불안을 만성화시킬 수 있다.



꼭 많은 사람을 사귀고 외향적인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나의 굳어진 표정과 말 없음이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은 메시지를 주어 오해를 살 확률을 높여 원만한 상호작용이 어려워진다거나, 타인과의 교류나 발표의 기회를 최소화하여 삶이 풍성해질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어른이 된 우리는, 기질과 초기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난 선택을, 쉽지는 않더라도 할 수 있다. 


곁에함께심리상담센터 대표/ 임상심리전문가 백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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