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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영 Jul 15. 2020

어떠한 애도행위와 피해자 연대의사가 양립할 수 있는가

#박원순_시장을_고소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평소 선행을 많이 하고 인품 좋게 생각하던 이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되었고, 정황상 가해 가능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상황이라고 하자. 마음이 무척 복잡할 것이다. 왜 안 그러겠는가.


그렇다고 그런 상황에서 본인의 복잡한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가해자가 나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어떤 선행을 해왔는지 보통 이야기를 하는가? 해도 되는가? 혹여나 그 사람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나 말을 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상처 받을까봐 조심하려고 하지 않는가?


물론 가해자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사람이, 내심 그 사람을 안타까워하거나, 사적으로 찾아가서 위로의 말을 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과의 인연이 저마다 달라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마음보다 감싸고 싶은 마음이 더 클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뭘 잘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바로 악마화하지도, 바로 내치지도 않는다. 누구나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관계 맺을 때 상대에게 너무 높은 도덕성 잣대를 들이댄다면 사실 관계 맺을 사람이 얼마 남아나지도 않을 것이다. 나부터 손절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그 사람에게 위로를 했다는 사실 또한 피해자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도 모르는 경로로 상대 귀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만, 그럴 때라도 피해자가 나의 행동으로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나의 행동이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사람은 복잡한 존재다 뭐다, 너가 이분법적 사고에 갇힌 것이다 하고 되려 반박할 일이 아니라.


그런데 사실 현실에서 이걸 잘 못 지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피해자가 굉장한 고통을 받는다. 너도나도 얹는 말에, 때로는 피해자를 가해하려는 의도적인 의사 없이 이루어진 외견 ‘중립적인’ 말과 행동에 피해자는 가해자에게서 겪은 직접적 피해보다도 더한 고통과 고립감을 느낀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도 그런 일들이 많아서 용어도 만들어진 거 아닌가. ‘2차 피해’, ‘2차 가해’. 피해자 입장이 이해가 잘 안 되면, 내가 겪은 일이라고,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가정해보라고 한다.


다음은 안희정 사태 때 발표된 입장문 중 하나다. 입장문의 올바른 예시다.



그런데 가해자의 죽음이라는 사태가 얹어지자,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와 황망함, 슬픔 등에 압도되어서 그런지, 위와 같이 피해가 발생했을 때 마땅히 피해자에게 이입할 만한 마음의 여유를 거의 확보하지 못하는 것 같고, 감정이입이 이루어졌다면 마땅히 하게 되었을 생각들을 하지 못하며, 따르게 되었을 행동 준칙도 따르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이러니까 공공연하게 고인을 애도하는/조문 가는 행위(중립을 지킨다면서 피해 또한 언급하지만 결국 고인에 대한 애도나 본인의 혼란스러운 마음 표현에 더 방점을 찍은 말이나 글 포함)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행위가 양립할 수 있다는 말이, 너무 쉽게 나오는 것이다. 두 행위의 모순을 알기 때문에, 한 의원이 “차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도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조문가지 않기로 선택하고 이것을 표현함으로써 피해자에게 연대하고자 하는 의사를 더욱 분명히 한 것은 아닐까.


개인 일기장에, 의견을 같이 하는 친밀한 사람과의 담소에서 고인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한다든가, 사적으로 유가족에게 연락해서 애도 의사를 표하는 것까지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고인을 추종하고 신격화하는 무리에게 피해자가 신상털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고, 서울특별시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정계 거물들이 너 나할 것 없이 와서 애도 의사를 표하며, 시민분향소를 설치하여 시민들이 추모의 물결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나의 공공연한 애도 행위는 ‘이와 같은 위력에 힘을 싣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피해자에게 가해 의사가 전혀 없는’, ‘인간적인’, ‘인간의 도리를 다 하는’, ‘죽음을 기리는 신성불가침한’, ‘중립적인’ 행위인가? 그러면서 동시에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 괜찮은 것인가?


가해자가 죽지 않았다면, 가해자를 위로하는 행위나 가해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표현을 공공연하게 하면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고인의 업적을 잘 모르는, 그에게 그다지 감정이입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곁에함께심리상담센터 대표 / 임상심리전문가 백소영

#박원순_시장을_고소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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