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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우 Oct 25. 2024

1. 스물여덟 유하경.


잠에서 깼다. 아니, 꿈에서.

토요일 오후. 하경은 눈을 떴다. 잠들기 전 온열 매트 온도를 너무 높게 설정했는지 땀에 젖었다. 침대 머리로 손을 뻗어 온열 매트와 휴대전화 충전기들이 연결된 멀티탭 전원을 누른다. 그 옆에 놓인 두 대의 휴대전화에 충전이 시작된다는 알림이 뜬다. 탄식한다. 잠에 들기 전 멀티탭 전원 켜는 것을 잊은 것이다. 어쩐지 코가 시리더라니.

몇 달 전 이곳에 입주한 하경은 복층인 구조만 보고 덜컥 서명했다. 그리고 처음 맞는 겨울, 웃풍이 심하다. 보일러를 틀어도 한기가 돌았고 잠에서 깨면 코가 시렸다. 결국 절대 들이고 싶지 않았던, 할머니 댁에나 있을 법한 황토색 온열 매트를 들이고 말았다.

그 온열 매트의 전원을 멀티탭에서 분리한다. 그리고 나란히 놓인 두 대의 휴대전화 중 몇 년 전 출시됐던 구형을 들어 메신저를 실행한다.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한다. 

-오늘 예정대로 진행하는 거 맞나요?

그렇다는 답을 보낸 후 침대 머리 언저리에 던져둔다. 그 옆에 놓인 신형 휴대전화를 챙겨 화장실로 향한다.

팬티를 벗어 문고리에 건다. 문고리에는 어제 벗어 걸어 둔 것까지 두 장의 팬티가 걸렸다. 땀에 젖은 반소매는 화장실 문밖으로, 굳이 어디를 향하지 않고 휙 던진다. 변기에 앉아 하룻밤 동안 고인 소변을 쏟아낸다. 휴대전화로 해몽을 검색해 보려다 검색어를 뭐라고 입력해야 할지 몰라, 눈을 감고 간밤에 꾼 꿈을 복기한다. 다리 사이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가늘어진다. 포기하고 음악을 재생한다. 오래된 축음기에서 재생되는 듯한 음악이 흐른다. 꿈속에서마저 사랑하는 이를 그리는 가사, 편안한 리듬과 몽환적인 여가수의 알토. 마약을 다룬, 피가 튀고 내장이 흐르는 영화의 삽입곡이다. 휴대전화를 화장실 선반에 넣고 물을 튼다.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바라본다. 얼굴을 거울에 가까이해 훑는다. 옆구리를 꼬집듯 살짝 잡아본다. 또 팔을 들어 털 한 올 없는 매끈한 겨드랑이를 점검한다. 고개를 숙여 민둥한 둔덕도 꼼꼼하게 점검한다. 물줄기에서 김이 오른다. 손을 갖다 대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확인한다. 샤워기를 들어 어깨에 가져다 댄다. 어깨에 닿아 부서진 물줄기가 가슴을 간지르고 아래로 흐른다.

화장실 옆에 둔 서랍장에서 팬티를 꺼낸다. 뒤를 가리는 부분은 끈 하나만이 달랑 달려있다. 그 끈이 충분히 파묻히도록 당겨 입는다. 어깨끈이 가는 민소매도 꺼내 입는다. 가슴과 민소매 사이로 손을 넣어 가슴 위치를 패드에 알맞게 바로잡는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연다. 안에 든 것이라곤 검게 변한 바나나 두 개, 언젠가 편의점에서 사 둔 요거트 그리고 반쯤 마신 2리터 생수 한 통이 전부다. 배달을 시킬지 잠시 고민한다. 그러나 붇은 옆구리 살이 못내 신경 쓰여 맘을 접는다. 냉장고에서 바나나와 요거트를 꺼내 입주 후 펼쳐둔 이래 다시 접은 적 없는 붙박이 식탁 위에 둔다. 의자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올린다. 침대 옆에 둔 구형 휴대전화 알림이 울린다. 가서 확인한다.

- 네! 그럼 이따 봬요!

쓸데없이 밝다. 답장하지 않고 충전기를 분리해 주방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는다. 구형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툭 던지듯 둔다. 바나나 껍질을 까 한입 베어 문다. 다른 손으로는 신형 휴대전화로 헬스장을 검색한다. 몇 달 전, 하경은 인근 헬스장에 일 년 이용권을 등록했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트레이너와 사소한 마찰이 생겼고 그 후로는 다시 가지 않는다. 헬스장에 환불을 요구했지만, 환불 금액은 등록할 당시 결제했던 금액보다 터무니없이 적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바, 합당한 금액을 환불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 방법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으나, 생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일어나 복층으로 향한다. 계단을 오르는 하경의 볼기에는 분홍의 자국이 남았다. 입주 당시에는 침실로 사용했던 복층이지만, 졸음이 쏟아지는 몸을 이끌고 오르고 내리기가 고되어 한 달 만에 아래층으로 침대를 내렸다. 침대가 내려온 아래층은 그만큼 좁아져, 옷을 전부 올려야 했고 그 후로 복층은 옷방이 되었다. 다만, 샤워 후에 발가벗은 몸으로 복층을 오르기에는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남사스러워 속옷을 보관하는 서랍장만큼은 화장실 옆에 남겼다. 민소매 위에 백화점에서 산 남색 스웨터를 입는다. 니트의 왼쪽 가슴팍에는 말을 탄 남자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양의 작은 로고가 보인다.

주방으로 돌아와 식탁 위 빈 요거트 통과 바나나 껍질을 한쪽에 몬다. 구석에 있던 거울과 화장품이 든 파우치를 끌어와 앞에 두고, 항상 전원이 꽂혀 있는 드라이어를 든다. 다른 손으로 거울의 위치를 바로잡아 얼굴을 비추고 드라이어를 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대단한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춘기에도 여드름 하나 나지 않던 뽀얗고 투명한 피부. 똑바른 포물선을 그리는 헤어 라인. 숱이 적당하고 옆으로 긴 일자 눈썹은 화장할 때도 굳이 손을 대지 않는다. 옅게 쌍꺼풀이 진 눈은 하경의 신체 중 유일하게 현대 의술의 혜택을 받았다. 높지는 않지만, 선이 옅은 콧대와 그 끝에 동그란 콧방울은 그녀가 또래보다 어려 뵈는 까닭이다. 흰 피부에 대비되어 색이 선명한 입술, 특히 윗입술 정중앙에 유난히 불거진 마름모꼴의 붉은 돌기를 보고 어떤 남자는 하경의 음핵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드라이어 끈다. 신형 휴대전화를 챙겨 현관으로 향한다. 신발장 옆에 세워 놓은 전신 거울을 마주 보고 서서 자기를 비추어 본다. 검정의 긴 머리칼이 차분하게 떨어지다가 끝에서 살짝 말린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은 어차피 가리거나 잘라낼 테니 상관없다. 두 다리를 한데 모아 붙이고 허리 뒤쪽으로 손을 뻗는다. 입고 있는 스웨터를 뒤에서 모아 움켜 쥐고 당긴다. 그러자 내세울 만큼은 아니지만, 손이 유별나게 크지 않은 남자라면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봉긋 솟은 가슴과 딴은 살이 올랐다지만, 그럼에도 반대로 마주 보는 괄호처럼 곡선을 그리고 있는 허리가 도드라진다. 여전히 팬티 바람인 아랫도리에는 부채꼴로 넓게 퍼진 골반과 한 줌 가는 발목을 이으며 평행하는 곧은 두 다리가 보인다. 휴대전화를 들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촬영한다. 촬영한 사진을 확인한다. 이번에는 양반다리를 한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 은밀한 곳이 팬티에 아슬아슬하게 가려 보이지는 않는다. 옴폭 들어간 자국이 생겼을 뿐. 촬영한다. 사진을 확인한다.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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