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정의 시네마테라피] 영화 <위플래쉬>
음악 영화의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집념과 파괴적인 집착의 본질을 집요하고 처절하게 탐구한다. 데이미언 셔젤(Damien Chazelle) 감독의 영화 <위플래쉬(Whiplash)>가 현재 극장에서 재개봉 상영 중이다. 영화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를 꿈꾸는 청년 앤드류(마일즈 텔러)의 극한의 연주로 숨 돌릴 틈이 없고, 플레처(J.K. 시몬스) 교수의 가학적인 폭력이 갈등을 넘어선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감독은 지휘자처럼, 연출의 모든 요소를 악보처럼 배치하며 배우의 연기를 하나의 악기처럼 조율했다. 영화는 음악적 리듬을 ‘영화적 언어’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고, 관객을 극한의 긴장 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해 보인다.
폭력과 카타르시스의 연출적 전환
앤드류가 이미 충분히 잘해도, 플레처는 더 잘하라고 몰아붙인다. 그의 눈에는 학생들이 부서지든 말든 상관없어 보인다. 오직 최고의 연주만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비인격적이고 꽤 폭력적이다. 그런데 극 중 플레처의 교육 방식은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서도록 끝없이 자극을 주는 극단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현대 사회의 성과 지상주의와 최고를 향한 강박이라는 문제의식을 찾을 수 있다. 계속해서 더 높은 기준을 강요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는 강박이 영화 내내 팽팽하게 이어진다.
감독은 작품의 모든 요소가 음악의 박자처럼 흐르도록 설계했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관객을 영화의 긴장감에 완전히 가두고, 예술과 폭력의 모호한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로 인해 영화는 하나의 서사를 넘어선 예술적 퍼포먼스로 그려진다. 극 중 플레처의 폭언과 학대는 마치 앤드류를 더 날카롭고 정밀하게 조율하는 것 같다. 앤드류 자체가 하나의 악기인 것처럼. 그렇게 연출은 폭력의 에너지를 예술의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며 연기와 연출의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집착과 광란의 질주곡
앤드류는 플레처의 가혹한 교육을 견디면서 점점 더 광기 어린 집념에 사로잡힌다. 친구들과 가족, 연인까지 뒤로하고, 오직 드럼에만 몰두한다. 손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피곤으로 정신이 흐릿해져도 멈추지 않는다. 플레처의 인정을 받는 그 순간의 짜릿함만이 마치 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주는 듯하다. 그는 무대 위 메인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 압박 사이에서 끝없이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연주에서 관객은 ‘양가감정’을 느끼게 된다. 손에서 피가 배어 나와도 멈추지 않고 광란의 질주를 하는 그의 연주는 가히 폭발적이다. 이 장면에서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맞서듯 혹은 완전히 동화된 듯, 숨 막히는 연주 실력을 선보인다. 그의 완벽한 연주가 대단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럽다.
<위플래쉬>가 이토록 강렬한 이유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대 사회의 끝없는 경쟁과 성과 지상주의의 어두운 이면까지 그대로 비춘다. 최고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부수는 과정을 불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완벽을 위한 허용'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묻게 된다.
마지막 연주가 끝나고 카메라가 앤드류의 얼굴을 비출 때, 그의 얼굴에서는 해방감이 아닌 광기가 느껴진다. 이토록 처절하게 얻은 <위플래쉬>에서의 성공에, 감독의 또 다른 작품인 <라라랜드>의 낭만을 한 스푼 넣고 싶다. 어쩌면 꿈은 이토록 고통스럽기도, 그토록 아름답기도 한 것 아닐까.
오마이뉴스와 한국경제신문 아르떼
[이언정의 시네마테라피]를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