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정의 시네마테라피] 영화<리얼리티+>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데렐라는 밤 12시, 자정이 되면 마법이 풀려 다시 누더기를 걸치게 된다. 동화 신데렐라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의 영화 <리얼리티+(REALITY+)>는 제97회 아카데미 분장상에 빛나는 영화 <서브스턴스(THE SUBSTANCE)>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코랄리 파르쟈(Coralie Fargeat) 감독은 <서브스턴스> 이전에 이미 이 영화를 통해 외형을 중요시하는 현대인에게 단 23분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테크놀로지(technology)가 인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영화는, 증강현실 칩을 심으면 자신이 원하는 목소리부터 얼굴과 체형까지 외형을 이상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는다. 이른바 ‘외모 구독서비스’라 부를 수 있다.
12시간 동안 활성화되는 이 칩을 이식한 사람들은 서로가 꿈꿔왔던 모습으로 자신을 설정하고 서로를 보게 된다. 그들은 데이트를 하다가도 12시간이 다 되기 전에 급하게 헤어져야 한다. 도망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명확하다. 상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열등한 모습을 보일 수 없으므로 황급히 도망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어딘가 서글퍼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는 인물들의 자기혐오를 기저에 깔고 있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 속 이상화된 이미지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분리하지 못하고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거울에 비친 왜곡된 자아가 점점 인물을 침식하는 과정을 감독은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풀어냈다. 이상적 자아에 대한 강박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영화는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데미 무어(Demi Moore)의 열연이 돋보였던 감독의 최근작에서 엘리자베스 등을 가르고 탄생하던 수의 모습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감독은 10여 년 전, 이 영화를 통해 인물의 등을 조명한 바 있다. 매력을 느낀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달콤한 꿈에 빠졌던 남성의 마구잡이로 꿰맨 등은 카메라를 통해 관객을 눈길을 사로잡는다. 단편 영화 <리얼리티+>가 더 매운맛의 장편 영화 <서브스턴스>로 확장되었고 더 주도면밀하게 처참해졌을 뿐, 영화는 감독의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AI 시대 어쩌면 곧 실제 있을 법도 한, 근미래의 외모 구독서비스를 조명한 감독의 상상력이 흥미롭다. 공평하게 인간의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흘러서 누구나 나이 들어가고 누구나 눈부신 젊음을 만끽하다가 누구나 노화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할 때 불안이 엄습한다.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 더 인위적이고 왜곡된 현실을 만들어내며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감독의 두 영화에 고스란히 묻었다.
영화 <리얼리티+>는 현대인의 정체성 탐구라는 고전적 주제를 미래 기술이라는 렌즈를 통해 새롭게 그려냈다. 단순히 ‘기술의 남용’이라는 경고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나’를 향한 끝없는 욕망이 결국 진짜 ‘나’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며 관객에게 날 선 질문을 던진다.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는 시대이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본질과 감정의 가치가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디지털 환상’과 ‘정체성의 붕괴’를 탁월하게 그려낸 짧은 영화,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남긴 긴 여운을 찬찬히 곱씹어볼 때이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말처럼, 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사회적 현실과 대중의 집단 심리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영화로 읽는 세상은 그래서인지 현실과 묘하게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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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아르떼'와 '오마이뉴스'에 [이언정의 시네마테라피] 영화 칼럼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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