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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암댁 Mar 23. 2022

정돈의 힘


토요일 눈이 왔다. 제법 많은 눈이 내렸지만 내리자마자 녹는 그런 눈이었다. 서울은 그랬다.

영월의 눈 쌓이는 사진을 보면서 '이 봄에 이게 무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내내 내린 눈은 일요일에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망경산사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어김없이 월요일이 되었고, 나는 떠났다.



영월역에 내리니 햇볕도 제법 따뜻했다. 혹시 눈이 많이 녹았을지 몰라! 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김삿갓면으로 들어서는 길에 만년설처럼 산위에 쌓인 눈을 보고, 기대를 접었다. 이번엔 초록보다는 흰색을 많이 보고 오겠구나. 허허허. 해발 800고지의 망경산사에 다다르니 여긴 아직 겨울인가 싶을 정도로 하얀세상이었다.



오랜만에 만경사에 올라보기로 했다. 망경산사 위에 20분 정도 올라가면 만경사가 있는데, 그곳에서 보는 풍경이 절경이라! 오르는 길이 녹록치 않았다. 겨울에 내린 눈은 소복히 쌓이는데, 봄에 내린 눈은 묵묵히 쌓여 무겁고 질척인다. 겨울에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눈과 다르게 녹아가는 봄의 눈은 물기가 있어 미끄럽다. 나무위에 쌓인 눈이 철퍼덕 철퍼덕 떨어지는데 봄의 새소리는 저멀리서 들려오는게 이질감이 들었다. 겨울엔 어두워서 잘 안올라갔는데, 여름엔 하루 일과를 끝내고 만경사에 올라가 지는 해를 무심히 바라보며 하루를 뿌듯해하는 청춘 놀이를 하곤했다. 올라가 보니 역시나 절경이다. 초록의 만경사도 예뻤지만, 하얀 만경사도 예쁘구나!



스키타듯 만경사에서 내려와 스님을 찾았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요? 했더니, 오늘은 청소를 하자하신다. 작년엔 너무 일찍와버린 봄 때문에 나물 뜯으랴 청소하랴 정신이 없었는데, 올해는 길어진 겨울덕분에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 여유롭다. 산나물 전시관과 명상쉼터의 청소를 맡았다.


청소 (淸掃)

[명사]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


정돈 (整頓)  

[명사] 어지럽게 흩어진 것을 규모 있게 고쳐 놓거나 가지런히 바로잡아 정리함.


 난 청소가 싫었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티가 나지 않는다. 대체 끝이 없다. 그나마 티가나는 정돈도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늘 물건을 쌓아두고 어떻게 테트리스를 하면 좋을지 한숨부터 쉬고 시작한다. 그렇게 힘든 일이다보니 눈에 안보이는 곳은 덮어두고, 너무 힘든일은 타협하여 적당히 했다. 좀 예쁘게 하고 싶어 청소의 기술같은 책을 보면 모든 소품을 이용해 도구를 예쁘게 진열하고, 모든 약품(?)을 사용해 삐까뻔쩍 닦는데, 보는 것만으로 버거워서 아예 시도도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소와 정돈은 나에게 돈이 들고 버거운 일로 여겨졌다.


그렇게 버겁던 일이었는데, 망경산사에 와서 스님들과 보살님들과 같이 청소하면서 청소와 정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이런 곳도 닦나요? 아니 먼지도 없는데 또 닦나요? 아니 언제 이렇게 하나하나 하나요? 처음엔 이 모든 일이 비 효율적으로 보였고, 내마음은 삐쭉거렸다. 스님들 앞에서 칭얼거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충 할 수도 없고... 힝... 출렁이는 내 마음을 다독이며 스님 따라서 하나씩 차분히 차근히 무념무상으로 하나씩 털고 쓸고 닦았다. 언제 다해! 싶었지만 끝은 있었다. 심지어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그렇게 힘들지 않고 끝나있었다. 그때 알았다. 청소의 기술은 스킬이 아니라 대충하려는, 귀찮아하는 내 마음과 싸워 이기는 것이라는 걸...


산나물 전시관에 있는 모든 전시물을 하나하나 들어 전시대를 닦아내고, 전시물을 닦아 올려두고, 액자 틀도 한번씩 털어주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고 창틀과 창문을 닦아내고 주변을 쓸어두었다. 명상 쉼터도 창문과 창틀을 닦고 그 동안 손이 잘 닿지 않았을 곳을 한번씩 더 살펴 닦아두었다. 그래도 여전히 스님들이 보시기에 좀 더 닦아내야할 곳이 있었을런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닿는 곳까지는 일단 정돈하고 청소해두었다.




청소를 하면서...그러니까 청소는 노동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서 내 생각이 닿는 곳까지 두루 살펴 돌보아두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럽고 흩어져있고 곳곳이 더러운 15평의 작은 우리집이 생각났다. 하하.. 웃펐다. 그 작은 집에도 내 생각이 닿지 않는 곳이 있고, 생각이 닿지 않는 물건이 있으며,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짐 덩어리들과 아직도 살피지 못한 구석구석이 있는데... 하하하...



스님들께서 어떻게 살피시는지 이곳저곳을 살폈다. 쓰시는 도구들이 하나하나 가지런히 그 쓰임이 다하도록 자리를 잡고 있다. 손이 닿는 자리에, 꺼내기 어렵지 않게 적절히. 깨끗이 털어서 씻어서 다음을 위해 잘 정돈해 두는 것. 내가 가진 내 물건을 온전히 두고 온전히 쓰는 일 그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니. 모든 일의 시작임에도 난 여전히 그 일에 익숙치 않다.


집에와서 다시 돌아봐야겠다. 내 물건들과 그 물건의 자리. 내 공간 그리고 살펴지지 않은 공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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