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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암댁 Mar 20. 2022

냉이의 시간


어제는 헛개를 다 줍고 꽃잔디를 옮겨 심을 때 즈음 하늘이 꾸물꾸물 했다. 한참 꽃잔디와 사투를 벌이는데 비가 추적추적 쏴아 하고 내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내린 비는 밤새 내내 내렸다.



따뜻하게 노곤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니 비는 그쳐있고, 안개 자욱한 사이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직 젖은 땅에는 발이 푹푹 빠지고, 습이 차서 빡빡한 공기에 숨 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상쾌했다. 비가 온 간밤에 혹시나 순을 더 올렸을까 하여 한번 쓱 둘러봤지만, 아직 추위에 얼굴을 내밀 생각이 없는 봄기운이다.



나는 아침기운을 차리러 공양간으로. 떡국이다. 무 당근 배추 표고가 들어간 떡국. 늘 그랬듯…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떡국은 무엇이었느냐 라는 생각에 한술 한술 천천히 떠먹는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야채만으로도 꽉 들어차는 이 감칠맛. 어떻게 조리하셨길래 이렇게 딱 알맞을 수 있을까. 떡국에도 무, 반찬에도 무말랭이, 무장아찌 이지만, 같은 무라는 지겨움이 없다. 스스로 맛난 음식을 만들었다고 기고만장해지다가도 이렇게 한번 먹고 나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다소곳 해진다.



공양을 마치고 안개가 걷히는 망경산사 경내를 돌아본다. 움트는 생강나무, 이제 순을 올리는 명이나물, 월동한 유채와 보리, 씨앗이 다 떨어진 곰취와 방풍, 그리고 촉촉이 젖은 망경산사의 모든 것들. 차분해진 땅 사이로 망경산사의 대웅전이 보인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지지 않았다. 탄광촌에 버려진 건물을 다시 바로 세웠다. 그 건물이 지금은 자연 속이 폭 담겨있다.



한바퀴 돌고 오니 스님께서 저기 저 농막 명상원 앞에 냉이가 많으니 냉이를 해오라신다. 이야! 냉이의 시간이다. 냉이는 땅에 폭 박혀저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를 찾아내면 그 주변이 다 냉이가 퍼져있다. 봄! 하면 냉이같지만 겨울에도 냉이는 있다. 다만 땅이 얼어서 뽑지 못할 뿐. 되려 겨울 냉이가 뿌리가 달달하여 맛있지만, 또 봄의 냉이는 향이 조금씩 올라와 뿌리의 적당히 달달한 겨울의 맛과 잎의 적당한 봄의 향을 즐길 수 있다.



농막 명상원 앞은 말씀하신대로 냉이가 바글바글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냉이를 캐는 것이 힘들것 같다 싶지만. 햇빛이 촤아~ 하고 내려쬐는 곳에 뽁뽁 뽑히는 냉이를 캐고 있노라면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뻐근해지는 것도 잊는다.


냉이를 막 캐면 될것 같지만 한번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 해보면서 캔다.


어떤 냉이는 땅에 콕 박혀서 뿌리를 잡고 흔들어도 잘 뽑히지 않는다. 얼마나 땅을 꽉 잡고 자라났는지… 조심조심 뽑고나면 짱짱한 원뿌리의 길이가 한뼘이다. 지난 가을, 씨가 땅 깊이 자리를 잡은 것인지 아니면 땅이 부드러워 뿌리가 깊게 파고 들어간 것인지 깊디 깊다. 하지만 어떤 냉이는 얕디 얕아 잎만 살짝 들면 뽑힌다. 원뿌리와 곁뿌리의 두께차이가 나지 않는다. 아슬아슬 땅을 붙잡고 있던 모습이다. 땅을 아슬아슬 잡고 살아냈지만, 그래도 적당히 땅에 발을 디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그런지 잎도 뿌리도 힘아리가 없고 맛도 향도 부족하다.


어떤 냉이는 잎이 넓다. 햇빛을 잘 받는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타고나길 잎의 성장이 빠른 것인지 이미 잎을 휘둘러 좁은 땅을 나눠쓰지 않고 혼자 잎을 당당하게 펼치고 있다. 그런데 그 옆에 낑긴 냉이는 뿌리는 비슷한데 잎은 넓게 펴지 못하고 좁은 공간에서 아둥바둥 살아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잎 큰 냉이를 뽑아주고 낑긴 냉이에게 좀 더 넓은 공간을 만들어준다. 좁은 집에 낑겨 사는 모습같아서 나는 그 잎 작은 냉이에게 더 너그러워진다.


어떤 냉이는 잎모양이 유독 날카롭고, 어떤 냉이는 이미 꽃대를 올리고 있고, 어떤 냉이는 아직도 꽁하니 있다. 그 어떤 냉이도 같은 냉이가 없다.



혼자서 냉이에게 빙의 되어 ‘이 냉이는 열심히 겨울을 살았군, 이 냉이는 너무 욕심을 부려 살고 있네, 이 냉이는 참 힘들게 살았어’ 이러면서 한참을 캐다가 뻐근해진 허리를 잠시 펴본다. 햇빛이 산넘어 깔리고 땅도 나무도 반짝이는 시간. 이래서 밖에서 땅만지는 일을 좋아한다.



뿌리가 긴 냉이 하나를 캐서 땅에 놓고 이번 겨울의 추위를 가늠한다. 나는 이번 겨울이 그렇게 춥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농부님들은 이번 겨울이 땅이 마르고 유독 추운 겨울이라고 하셨다. 그만큼 뿌리는 얇고 긴 듯하다. 추웠으니 물이 없으니 길어졌어야 할 수 밖에… 이번 겨울 냉이도 열심히 살아냈구나 생각하며 내 지난 겨울을 생각한다. ‘ 난… 열심히 살아냈던가…’



모든 냉이를 캐진 않았다. 그래도 몇은 남겨 꽃을 피우고 씨를 맺게 해야 또 내가 냉이를 먹지. 흐흐흐. 빡빡한 곳은 좀 캐서 공간을 만들어주고, 좀 크게 짱짱하게 자란 냉이 몇개도 좀 캐고 그렇게 듬성듬성 캔 냉이가 바구니에 가득 찼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이만큼만 해서 내려가자.



캐온 냉이를 후다닥 씻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무르고 떨어지는 잎이 많아진다. 더이상 흙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헹군다. 깨끗이 씻어 햇빛에 건져두니 아이참 예쁘네ㅎㅎ




그러나 그제부터 지겨움과 내면의 싸움인 손질이 시작된다. 잔뿌리를 뽑아주고 잎과 뿌리 사이의 흙을 한번 더 닦아주고 얼어서 녹은 잎을 떼준다. 끝없이 끝없이 해준다. 그래도 처음엔 향긋한 냉이의 향을 즐기며 천천히 손질을 한다. 그러나 향에도 적응이 되고 행동에도 적응이 되면 그 때부터 몸이 베베 꼬인다. 손질이 대충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건 먹는거야… 대충하면 안되. 열심히 겨울을 살아낸 냉이를 헛되게 하지 말자고!!’



지나가던 고양이가 물먹는 모습을 보면서 잠깐 쉬기도 했다가, 이런저런 냉이의 모습도 다시한번 확인했다가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가며 2시간동안 냉이 손질을 마친다. 휴… 제법 즐거운 싸움(?)이었다.


오랜 손질을 하지만 막상 데쳐서 무쳐놓고 보면은 한끼 식사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손질하고도 한번 더 씻어 내고 또 두꺼운 뿌리들은 먹기 좋게 손질을 한번 더 거치면… 그래 이래서 냉이를 잘 안먹지… 하지만 시간과 공을 들여 잘 무쳐낸 냉이 무침 한 젓가락을 입에 넣으면 달콤하면서 푸릇한 향과 흙향이 입에 가득이다. 봄 향긋함에 눈이 절로 감긴다. 내가 이러려고 냉이를 손질했지.흐흐흐


냉이의 시간은 이제 길지 않다. 잎이 커지면서 향이야 더 나겠지만, 다른 나물들도 개성껏 향을 내뿜을 것이고, 냉이의 잎은 점점 질겨지면서 꽃대가 올라와 잎의 향은 곧 떨어질 것이다. 냉이의 시간은 어쩌면 지겹고 귀찮음을 이겨내야하는 시간일지도 모르나 그 끝은 향기롭고 달큰할테니 이번 봄에도 한번쯤 냉이의 시간을 빌려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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