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
이 곳은 밥도 잠자리도 무상으로 제공해준다
그리고 상처도 덤으로 준다.
나의 집은 안전하지 않았다. 10대 시절 나의 집이 안전하지 않음은 익히 알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곳이 나에게 줄 영향이 아니 피해가 너무 무서웠다.
올바르지 않은 부모 밑에서 자랄 내가 망가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나의 부모는 맞고 난 망가지지 않는다고.'
그 자기세뇌는 20대에 형제의 자살시도로 무너졌다.
형제의 우울증 판정과 자살시도 자해는 나의 불안에 마지막 한 방울을 아슬아슬하게 더하는 중이었다.
마치 물이 가득 찬 물컵에 물 한 방울씩 떨어뜨리며 언제 넘치나를 보는 게임 같았다.
그 마지막 한 방울은 기어코 물컵에 닿았고 나의 물은 컵을 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20대의 난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돈은 없지만 나가야 한다는 위급함만 있었다. 20대 초반의 난 부모의 돈을 빌렸다.
시작은 고시원이었다. 하지만 너무 비싼 고시원 방세와 옆방의 어마무시한 소음 공해로 나는 쉐어하우스로 이사갔다. 당시 고시원은 다 옆방 소음을 공유하는 곳이긴 했지만 난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통화 소음 그리고 그녀의 학점 문제까지 공유 당했어야 했다. 내 옆방의 그녀는 새벽 4시에 통화하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국 난 그녀도 내보내고 나도 나가면서 그녀와 불친절한 대응을 한 고시원에게 한 방 먹였다.
그리고 찾아간 쉐어하우스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나처럼 가정 문제가 있어서 나온 이들의 쉼터였다. 하지만 그 역시 새벽 1시에 내 침대 앞 베란다의 건조기를 돌리는 이슈로 인해 참다 못해 나오게 됐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밖에서 살았던 집 중에 가장 좋은 집이긴 했다. 따스한 햇살과 거실은 그 집이 최고였다. 그리고 그 땐 그 쉐어하우스 메이트들이 너무 싫었지만 지금은 다들 어렸구나 하고 이해도된다. 그렇다고 지금 연락을 하진 않지만 말이다.
마지막 쉐어하우스에서는 쉐어하우스 관리자가 나가라고 해서 나갔다. 그 때 당시 실제 집주인과 관리자가 달랐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얼결에 난 완전히 자취를 시작하게 되어야 했다. 결국 마지막 쉐어하우스에서 거리 10분인 곳에 자취방을 구했다. 그렇게 자취를 5년 했다. 고시원 부터 시작하면 집을 나와 산거는 7년 정도이다.
역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나는 다시 모든 기억을 잊고 본가로 돌아왔다. 작은 집은 나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거실이 있는 본가는 내 정신건강에 오히려 좋은 영향을 미치는 듯 했다. 더 정확히 돌아와야 했던 이유는 내가 직장을 때려쳤기에 더 이상 월세를 낼 경제적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이유들이 합쳐져 난 7년만에 위험한 본가로 돌아왔다.
본가로 돌아오고 얼마지나지 않아 난 잊고 있던 문제들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엄마를 마주해야 했다.
나를 성추행한 자신의 동생과 여전히 끈끈한 우애를 다지며
자신의 엄마의 장례식에 오지 않겠다는 자식을 받아들인 그녀, 나의 엄마.
내가 원한건, 나를 성추행한 엄마의 동생과 연을 끊던가
아니면 자신의 엄마의 장례식장에 피해자인 딸을 숨기는 게 아니라 가해자인 자신의 동생을 숨겨주는
그런 ...그런 엄마였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둘 다 하지 않았다.
아직 외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지만 피해자인 나는 숨을 예정이다.
이런 나의 부모는, 엄마는 (옆에서 다 알면서 침묵하는 아빠도 싫다) 참으로도 역겨웠다.
여전히 나의 부모는 내 앞에서 아주 자연스레 그사람 이름을 말한다. 그걸 듣고 내가 화나서 방에 들어가면
한 마디 한다.
'알겠어 걱정마 이제 말 안할게'
그렇게 나의 소금 뿌려진 나의 상처는 사과 한 번 받지 못하고 또 게눈감추듯 부모에게 무시 당한다.
그들은 미안해 하지 않는다.
본가로 돌아온 초반에는 이런 그들의 역겨움으로 인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30대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