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멜리에>의 아멜리처럼 세상을 볼래.
열다섯 살쯤 열병 같은 사춘기를 오래 앓을 때, 영화 <아멜리에>를 처음 봤다. 그때 내가 살던 부산 남천동의 하늘과 공기는 회색의 채도를 조금 섞어둔 것 같은 탁한 하늘색이었는데, 영화 속의 세상은 알록달록하고 동글동글했다. 영화 배경 속 공기를 마시면 솜사탕 맛이 날 것만 같았다.
영화는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색채를 유지하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인 아멜리는 의도치 않게 행복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낸다. 군의관인 아빠를 오랜만에 보면 설레는 마음을 아빠가 심장병으로 오해해 버리고, 그래서 엄마와 홈스쿨링을 하게 되어 학교를 가지 못하고, 신경증이 있는 엄마의 스트레스 때문에 애지중지 키우던 금붕어도 강으로 다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멜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항상 조금 이상하고 신비하면서 재밌다. 또 아멜리는 신기하게도 영화 내내 자신의 처지와 기분과 상황을 무마하려고 애써 열심히 살지도 않는다. 그런 서사는 마치 목록에 없는 듯, 그냥 그녀의 삶에 어려있는 그 호기심 가득하고 따뜻한 느낌 대로 약간 대충.. 사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영화를 보는 어린 날의 나는 그게 마냥 좋았다.
<아멜리에>에서 어린 아멜리는 LP판이 크레페처럼 프라이팬에 까만 반죽을 구워 스티커를 붙여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 장면을 보고 난 이후로 난 여전히 LP판만 보면 웃음이 난다. 크레페 집에 가면 꼭 까만 반죽을 구워 나만의 LP판을 만들고 싶기도 하고.
집 앞 식료품 점에서 아멜리가 심심하면 몰래 곡식자루에 손을 넣었다 빼는데, 그 비밀스러운 장난의 느낌과 차가운 곡식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손의 시원한 기분이 생생하게 짜릿해서, 재래시장에 가면 나도 콩자루 곡식자루에 몰래 손을 넣어보고 싶은 마음을 혼자 꾹 참느라 여전히 혼난다. 아멜리가 우연히 토너 뚜껑을 떨어뜨리면서 발견하는 누군가의 오래된 장난감 박스는 내가 흔적도 없이 잃어버린 어린 날의 추억이 뭘지 되돌아보게 하고, 그 장난감 박스를 시간을 들여 아멜리가 찾아주는 장면은 봐도 봐도 한 번에 성큼 다가오는 잊었다 살아난 추억의 느낌이 따뜻하고 애틋하다. 마지막에 아멜리와 니노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80년대 파리 거리를 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의 해방감이 좋아서 이유 없이 답답할 때면 옛날 그 작은 PMP 화면으로 몇 번이고 돌려봤었다.
아멜리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하고, 안정적이다. 왜 그녀의 삶 속의 고난과 오해들은 불행의 힘을 잃는지, 어떻게 아멜리는 계속해서 세상을 향한 사랑과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을 간직할 수 있는지 영화를 처음 보는 열다섯의 나는 몰랐다.
이후 2007년, 내가 열일곱 살의 언저리를 지나고 있을 때쯤 나는 필연적으로 '인생은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문장을 만났다. 하복을 입고 있었고 그리 덥진 않았으니 아마 초여름을 지나고 있을 때쯤인가. 이 문장을 처음 만나고 가슴이 엄청 뛰어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되새겼더랬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쓰고 말하고 되새겨도 좋았던 주문같은 문장.
그리고 나는 그때 적확하게 알았다. 아멜리의 시선 속의 호기심과 사랑과 안정의 이유가 인생을 사랑이 서린 눈으로 대하기 때문이란 걸. 니노를 만나기 전이든 후든 상관없이 그녀가 결정한 생을 향한 시선의 색채는 사랑이었다는 걸. 그래서 모든 작은 고난과 불행이 그 힘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아, 나는 지금부터 매 순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지. 사랑이 어린 눈으로 보고 만지고 느끼며 살아야지. 사랑하지 않으면 인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갑자기 살아나는 기분. <아멜리에> 영화가 단번에 내 것이 되던 순간. 내가 겪은 시간과 겪을 시간이 모두 단숨에 엄청난 설렘과 가능성으로 다가오던 순간들. 내가 겪었던 괴로움과 불안과 아픔이 불행의 옷을 벋던 기적. 회색 채도가 섞인 도시의 하늘과 공기가 벚꽃을 한 스푼 섞은 것처럼 단내가 나던 기간들.
돌아보면 내 삶의 순간들 중 여전히 오래도록 선명한 채도와 명도로 남아 나를 먹이고 입히고 살리는 기억들은 모두 사랑이 깃들어있다. 아멜리의 시선과 그녀가 만들어가는 삶처럼.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니까, 난 사랑이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멋모르고 많은 것을 품고 사랑하며 살았다. 풋사랑에 아파하고 몸 달아하면서도 절실히 사랑했고, 마음을 떨리게 하는 그림과 음악과 영화와 문장들을 품고, 모든 생이 깃든 것을 사랑하리라 다짐하던 순간들이었다. 사랑이 가득해서 열일곱의 나부터 서른셋이 된 나의 인생은 무엇들로 가득하다.
사랑에 깃든 눈빛으로 바라보고 만지고 기억하면서 만들어낸 나의 선명하고 아름다운 찬란한 기억 속 세계들.
그 세계들이 요즘 나에게로 자꾸 걸어와 넘쳐흐른다.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생명과 수많은 마음이 깃든 것들을 사랑하면서 생긴 흔적과, 추억과, 흉터들이, 열다섯에 만났던 영화 <아멜리에>처럼 내 눈엔 이제 꽤 찬란해서, 이 찬란함이 가시고 색이 바래기 전에 쏟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인다.
나의 사랑의 단상과 기록들. 내 인생은 이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사랑이 있어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만 담고 있던 이야기를 영화를 단추 삼아 풀어보려 한다. 내 눈으로 보는 호기심과 사랑이 깃든 삶의 순간들. 내 삶을 흔들고 또 가득 담아내는 영화들과 내 이야기를 이젠 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