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 딴지 30년, 장롱면허 탈출한 지 15년. 이 정도면 거의 자동차로 전국 일주라도 해야 할 판인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경계를 넘어간 적이 거의 없는 ‘로컬 면허’다. 걷든 운전하든 길 위에서 멍때리기 일쑤고 사람 얼굴은 잘 알아보지만 길눈이 어둡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남편 차로 움직이다 보니 10년 된 내 차의 주행거리는 고작 2만 5천 km 정도. 고속도로를 타본 적이 없으니 가속페달을 좀 급하게 밟기라도 하면 레이싱 카에서나 나는 그런 소리가 난다.
“부아아아아앙”
처음에 고속주행으로 길들이지 않아서 그렇다는데 나는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고속주행할 일이 없으니까. 한번씩 부앙거릴 때마다 살짝 웃길 뿐이다.
'너 참 애쓴다'
예술의 전당 전시회를 예약한 날이 다가오던 어느날, 친구와커피를 마시다가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내 차로 가 볼까?!"
"그래. 백운호수나, 예술의 전당이나 거기가 거기야. 그냥 다 우리 동네다 생각하고 가면 돼."
"그래? 그럼 가 보지 뭐."
가는 길을 미리 검색했다.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미리 살펴두지 않으면 또 어느 동네에 가 있을지 모른다.
'통행료가 있다고? 앗 벌써 불안하다. 예술의 전당 갈 때 과천을 지나갔었는데 왜 자꾸 이 길로 가라는 거지.'
전시회 날 아침, 오전 10시가 넘었는데도 도로는 출근시간을 방불케 했다. 시 경계가 가까워지니 등이 편안하게 의자에 붙어있지를 못했다. 몇번이나 지나다닌 길이지만 이번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게 문제였다. 강남순환로 표지판을 보고 들어섰는데...
"아, 하이패스! 하이패스 안 써봤어. 신랑이 달아놨는데 되는지 안되는지 몰라."
톨게이트 코앞에서 다급해진 나의 외침에 친구는 당황하지 않고 측면을 눌렀다. 불이 들어오고 잔액을 말하는것 같았다.
"히야~ 하이패스를 다 써 보네."
쭉쭉 길이 뚫렸다. 그 긴 터널이 너무나 아늑하게 마음껏 달리라고 길을 열어주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해저 터널 재난 영화와 TV에서 본 터널 안 사고영상들 때문인지 터널에 들어갈 때면 약간 긴장하곤 했는데 오히려 터널 안이 안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터널은 터널이니까 제한속도는 지키는 걸로.
맨날 하는 운전인데 참나 신나는 건 또 뭔지... 난 참 일차원적인 기쁨을 자주 만끽하는 인간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울퉁이와 삐리의 하늘여행(하기노 치나츠/한솔교육)
퍼어엉! 지구를 관통하는 우물 속으로 떨어져 반대편 하늘로 솟아오른 그림책 속 악어와 병아리처럼 터널을 벗어나니 코앞이 사당역이었다.
우오오오~ 서울이닷!
예술의전당은, 아주 갈 만했다.
차선 변경 타이밍 정도는 운전경력 15년이면 거의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고길치로서의 두려움만 극복하면 되는 거였다.
"다음부터 예술의전당 갈 땐 내가 운전할게. 별거아니네"
"너 운전 잘 한다니까"
"흐흐흐, 조건이 있어. 꼭 네가 옆에 있어야 돼."
옆에 누군가 있기만 하면 세상 배짱 좋은 드라이버가 된다.
"지금 미리 이 차선으로 들어가야 돼."
"좀 있으면 이 차선 없어져."
내비게이션보다 한 발 먼저 나서서 길을 알려줄 사람,
"괜찮아. 저기서 돌리면 되지."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버벅대는 나를 웃으며 격려해줄 사람이 함께 있다면 어디든... 아니고 왠만하면 갈 수 있다.
나는 아직기계보다 사람이 더 믿음직스러운옛날 사람 아닌 옛날 사람 같은 요즘 사람.
고작 17km 떨어진 서울 찍고 온 게 뭐 대수일까 싶지만 길치 드라이버에겐 너무나 대수였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