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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푸딩 Aug 26. 2015

산책 #1

- 함께하는 그들만의 순간 

일을 엉망으로 끝내놓고 둘은 잠시 산책을 나섰다. 

 평화로우면서도 시끌시끌한 분위기의 거리에서 그들은 걸었다. 석양의 오묘한 빛이 온 거리를 물들이고 있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드는 가을 저녁이었다. 아이가 솜사탕을 달라고 손을 뻗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마음 또한 솜사탕처럼 부풀었다. 그녀는 괜히 부푼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앞만 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작게 구두소리가 났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대놓고 옆을 쳐다 볼 수도 없었기에 흘끔거리며 그의 발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출 뿐이었다. 원래 말 없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지금 이 거리에서, 그녀의 옆에서, 그는 유독 말이 없었다. 어색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작은 일에도 발끈하는 성격의 그녀는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산책하자 해놓고…”라고 톡 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조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른이 되면서 인내심이 생긴 것인지, 그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일종의 경험치가 생긴 것인지. 그래서 그녀는 그의 옆에서 조용히 걷기만 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가 그녀의 존재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만큼 가깝게, 그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만큼 멀게.


 어색한 분위기를 체감하며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그들. 솜사탕을 손에 들고 행복하게 웃는 아이를 지나치고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남녀의 손등이 톡하고 부딪힌 것은. 순간 그녀는 심장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떠올렸다. 언젠가 같은 일이 있었다. 졸업을 하기 전, 캠퍼스를 둘이 걷다가 손등을 부딪혔다. 그때부터 그녀의 마음이 가을날의 코스모스처럼 흔들렸던 것 같다. 물론, 그 때에도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수년 전의 일을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결국 처음 좋아한 것도 그녀, 지금 그를 좋아하는 것도 그녀다.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시간을 평화롭게, 그리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그는 잔잔하지만 답답한 호수 같았다. 이 산책이 끝나면 내 마음도 강제로 끝내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그녀의 걸음을 가속화시켰다. 맞춰 걷던 걸음이 빨라져 나란하던 그를 앞지르려고 하는 순간, 톡, 다시 한 번 그의 손등이 그녀의 손등을 때렸다. 그 작은 충돌은 그녀에게 너무 강렬했다. 그래서 엄지와 검지가 따뜻한 무언가에 잡혀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의 손이 아주 어색하게,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그녀의 손의 일부를 잡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거리에 아지랑이가 피어 시야를 가로 막는 것처럼 심하게 뒤틀렸다. 코랄 빛으로 물들었던 것이 멍이 든 것 같은 보랏빛으로 변질됐다.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오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그가 잡은 그녀의 손을 쳐다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쳐다보게 되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지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할 정신적인 여유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엄지와 검지에 잡힌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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