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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매니아 May 15. 2021

공정사회


 나는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막 21세기로 전환되던 무렵 대학에서 ‘영국문학배경’이라는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중간 과제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리뷰하는 리포트 과제를 내주었다. 교수님은 과제를 내주시면서 자신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관한 서적이나 논문은 모두 꿰뚫고 있으니 그런 전문가의 글을 베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표절이 발각되면 해당 리포트가 F 처리가 되는 것은 물론 과목 학점에도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교수님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이고 권위자인 교수보다는 부족하겠지만, 어떤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하여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점은 이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유토피아를 읽고 작성한 리포트를 제출하였고, 며칠 뒤 돌려받은 리포트에 적혀 있는 내 성적은 B였다. A가 아니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어도 교수님 기준에 내 리포트는 그 정도 수준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리포트를 돌려받은 날 수업시간에, 같은 과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동기가 먼저 내게 질문했다.

      

 “너 리포트 어떻게 썼어?


 “뭘 어떻게 써? 유토피아 읽어 보고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썼지. 내용이 좀 어려워서 읽는 것만 5시간 리포트 쓰는 데 5시간 해서 총 이틀 걸렸다. 너는?”


 “난 유토피아를 쓱 봤더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던데. 그래서 그냥 도서관에서 유토피아에 대해서 해설해 놓은 책이 있길래 그냥 그거 베껴서 냈어. 너도 알잖아? 나 고시 공부해서 시간도 별로 없는 거.”


 “책 베껴서 제출했다고? 교수님이 베껴서 내면 무조건 F라고 했잖아? 그럼 너 성적 뭐 받았어?”


 “교수님이 그런 말 했어? 난 못 들었는데? 어쨌든 나 리포트 A+ 받았어. 난 그냥 통째로 베꼈어.”


 순간 나는 바보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권에서나 ‘공정사회’ 구현을 표방해 왔다. 용어의 차이는 조금씩 있었지만, 큰 틀로는 공정한 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공정사회’라는 것이 어떤 사회일까? 인터넷 어학사전에는 공정사회를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고, 개인의 자유와 개성, 근면과 창의를 장려하며,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사전의 정의를 보고 있으면 뭔가 멋진 말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어서 좋은 뜻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딱히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은 아니다.      


 사회학자, 경제학자 같은 학자나 정치인 그리고 시민단체 간부 등 소위 우리나라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공정사회에 대해서 정의 내리고 있다. 기회의 균등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부의 분배 등 정의로운 결과를 강조할 수도 있다. 또, 그 기준이라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관점일 수도 있고 사회와 국가의 개입에 더 무게를 두기도 한다.          


 13년간 검찰수사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많은 범죄와 범죄자를 접하면서, 나도 ‘공정사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고 그 개념을 범죄현상과 연관 지어 정의 내려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절차나 규칙 등 사회에서 합의된 바를 준수하면서 성실히 사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공정사회’이고, 그런 사람들이 기울였던 노력을 오히려 비웃고 바보 취급하는 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앞서 든 일화에서, 절차나 규칙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 나보다 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반칙과 편법을 쓴 동기가 오히려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 일화는 나(개인)의 억울함, 또 다른 개인인 대학 동기의 표절이라는 부정행위 그리고 이를 부주의로 적발하지 못한 교수의 문제로 도식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잘못된 관행이 근절되지 않고 반복되고 일상적인 사회라면 그 사회는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의에 입각해서 봤을 때, 대한민국이라는 큰 사회가 공정사회라고 진단하는 것을 가로막는 현상들을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단순한 불공정과 억울함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의 영역에서 다뤄야 하는 현상들이 있다. 채용비리, 입시부정, 병역비리, 정부 보조금 편취, 보험사기 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검찰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위에서 예로 든 유형의 범죄들을 각 한 건 이상씩은 다뤄 봤는데, 모두 앞서 정의 내린 틀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채용비리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A라는 젊은이가 있다. 감겨오는 눈을 물리치며 공부하고 땀 흘려 스펙 쌓아서 한 기업에 지원서를 넣게 되었다. 역시 며칠 밤을 새우며 숱한 고민과 수정 끝에 완성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지원하는 기업에 제출하고 합격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다. 이 젊은이는 학점도 토익점수도 별로고 특별한 자격증도 없지만 오로지 회사 대표와 친구인 아버지를 둔 또래 젊은이의 존재 때문에 좌절하고 만다. 그런 ‘빽 좋은 친구’ 때문에 불합격한 사실은 모른 채, 자신의 부족한 실력과 스펙 탓을 하면서 도서관에서 더 공부하고 인턴 경력을 추가하기 위해 여기저기 지원서를 넣는다.」





 보험사기 범죄를 하나 더 예로 들어 설명을 하면, 고의의 보험사고를 일으켜 사고 확률을 조작하는 사람들은 보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보험사고의 우연적 발생”을 왜곡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확률 조작을 통해 보험사를 속이고 보험금을 타게 되면, 그 외에 성실하게 보험료를 납입하고 우연히 발생하는 보험사고로 보험금을 받는 대다수의 선량한 보험가입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구조이다.     


 입시부정, 병역비리, 정부 보조금 편취 같은 유형의 사건들도 반칙과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대학 지원자, 병역의무자, 중소기업 사장 등)의 노력과 선의를 우습게 만들고 그들에게 폐 끼치는 구조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검찰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앞서 언급된 유형의 사건들을 수사할 때에는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임했다. 비록 형식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형식적인 피해자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고 고통받는 다수의 실질적인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위에서 공정사회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현상들이라고 언급한 범죄들은 형식적으로는 법인이나 국가가 피해자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공정한 경쟁이나 구조였다면 자신이 지원한 학교나 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 또는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제대로 지원받거나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닐까?   

  



 한 사립학교에서 일어난 계약직 교사 채용비리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이러한 점을 여실히 느꼈다. 교장의 지시로 교감 이하 면접위원들이 특정 지원자에게 점수를 몰아주려고 시도하였고, 이러한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몇몇 위원들 때문에 특정 지원자의 합격이 여의치 않게 되자 교장(피의자)이 직접 주도하여 평가집계표까지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 학교의 채용전형은 1차 면접전형(수업 시연)과 2차 면접전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차 전형에서는 면접위원이 아닌 교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면접위원들이 몇 있었고, 그 결과 객관적으로 미숙한 시연을 보였던 지원자가 낮은 점수를 받았으나 상대적으로 낮은 경쟁률 덕분에 1차 전형을 커트라인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2차 전형에서는 교장이 직접 면접위원으로 참여하여 점수 몰아주기 분위기 조성 등 적극적인 방법으로 특정 지원자를 최종 합격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게 된 교장은 학교가 추구하는 인재상에 부합하는 지원자를 채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립학교 특성상 불가피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사전에 지원자들 이력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해당 지원자가 학교의 인재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판단해서 면접위원들에게 그 사람을 ‘잘 살펴보라’고 한 것뿐이라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아울러 평가집계표를 조작한 점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고, 해당 지원자와는 어떠한 친분도 없으며 해당 지원자의 채용과 관련하여 청탁을 받거나 대가를 수수한 적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설령 피의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특정인을 지목하여 면접위원들에게 신경 써 봐 달라고 요청 내지 지시한 것은 면접전형의 공정성을 해친 것은 틀림없었다. 또, 이로 인해 더 뛰어난 지원자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불합격하고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점을 들어 피의자를 추궁하였다. 하지만 피의자는 학교의 인재상에 적합해 보이는 인물을 끌어오기 위한 불가피한 처사였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더해, 최종 합격한 지원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뒀다는 말과 그 문제 되는 지원자로 인해 떨어진 사람도 다른 더 좋은 학교에 취직을 해서 잘 살고 있을 거라는 궤변에 가까운 말을 덧붙였다.


 교장과 문제가 된 최종합격자 간의 유착관계에 의심이 가는 점은 있었으나,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이를 최종적으로 규명해 내지는 못하였다. 다만, 교장의 면접 과정에서의 부당한 지시 및 평가집계표 조작에 관여한 부분에 대해서는 참고인들의 진술이 있어 업무방해죄 처벌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완벽히 공정한 사회라는 것은 이번 장(場)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들었던 개인적인 일화에 나오는 유토피아(utopia)의 원래 뜻인 ‘어디에도 없는 장소’처럼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회일지도 모른다. 검찰수사관으로서 공정사회를 멀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건들을 수사하면서 공정사회 구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비록 지금은 멀게 느껴지는 유토피아일지라도, 우리 사회가 룰과 합의를 지키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불이익이나 조롱을 당하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로 다가가는데 앞으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일조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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