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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매니아 Jun 05. 2021

사람들에게 돈 주겠다고 하소연한이유

 검사실에 근무하다 보면 간혹 사건관계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사건의 주요 쟁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거나 유일한 목격자 같은 참고인의 진술이 사건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데,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출석하지 않겠다고 할 때이다. 앞서 '참고인 여비 때문에 생긴 일'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면 된다. 그런데 그런 케이스도 아닌데 통사정을 하면서 힘겹게 사람들을 검찰청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기소중지 재외국민 특별자수기간’이라는 것이 있다. 사기죄 등의 혐의를 받고 해외 도피하여 기소중지되어 있는 재외국민이 일정 기간(특별자수기간) 동안 재외공관을 통해 재기신청(자수)하면 수사절차상 편의를 제공하는 제도를 말한다. 각국의 대한민국 재외공관은 재기신청인으로부터 신청서를 접수하면 이를 외교부와 법무부를 경유하여 검찰청에 전달한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시기를 전후하여 범한 부정수표단속법위반, 근로기준법위반, 사기죄, 횡령죄, 배임죄 등과 같은 범죄로 입건되었다가 해외 도피하여 기소중지 상태인 재외국민들에게 일종의 자수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우리 시대 아픔의 상징이었던 IMF 외환위기 시절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피해변제의 기회 제공 또는 간이조사 같은 절차를 거쳐 기소중지 해제, 여권 갱신 등의 조치를 통해 기소중지자의 대한민국으로의 입국 및 사업이나 인간관계 등을 보장해 주자는 취지이다. 2015년이 저물어갈 무렵, 몇몇 재외국민 특별사건 재기신청 사건이 검찰청 사건과를 통해 내가 근무하고 있던 검사실로 배당되었고 그중 내가 처리했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재기신청인은 미국에 있었고 피의자의 형이 동생의 재기신청과 관련된 업무를 대리하고 있었다. 형 이야기는 동생이 젊었을 때부터 철강사업을 하다가 IMF 무렵에 자금사정이 나빠져 거래처 사람들에게 발행해 주었던 당좌수표를 예금부족으로 부도나게 하였는데, 거의 동시에 미국으로 출국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동생이 미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고, 과거 일을 반성하면서 1997년 무렵 자신이 손해를 끼쳤던 피해자들에게 피해도 변제하고 사죄하기를 원해 재기신청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재기신청을 하게 된 동기가 과거 일에 대한 반성이나 피해자에 대한 사죄보다는 동생 본인의 자유로운 한국 입국과 사업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냐고 물어봤다. 재기신청인의 형은 “수사관님이나 검찰에 계신 분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동생은 한국에 저 이외에 가족도 없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떻게든 과거에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마련해 주십시오.”라며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재기신청을 하게 된 경위나 신청인의 진의가 어쨌든, 재기신청 건의 처리를 위해서는 피해자들과 연락이 닿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래서 오래되어서 종이 색도 누렇게 변한 옛날 기록을 뒤적거려 피해자의 연락처로 기재되어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시도해 보았다. 피해자는 재기신청인과 거래관계에 있다가 철강 대금으로 나중에 부도 처리된 당좌수표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피해자는 4명이었고 피해액은 각 500만 원씩 총 2,000만 원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지만, 모두 결번이거나 변경된 번호로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결국 피해자들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고 증명서상에 나와 있는 가족들의 통신가입 조회까지 하여 가까스로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의외로 피해자들이 재기신청인으로부터 대금결제수단으로 당좌수표를 받고 부도가 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된 오래전 일인 탓으로 보였다. 피해자나 그 가족들은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게다가 한창 검찰 사칭 보이스피싱 범죄가 기승을 부릴 때라 당좌수표 운운하면서 돈을 편취해 가는 신종 범죄로 생각했는지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을 인출하거나 계좌이체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겠다는 것으로 보이스피싱을 하겠냐고 반문하며 하소연을 했다. 내 신분과 이름 그리고 검사실 전화번호 등을 다 밝히고 검찰청 대표번호로 전화하여 진짜 검찰청에서 연락한 것임을 수차례 확인시켜 준 뒤에야 가까스로 검찰청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피해자 4명 그리고 그들의 가족까지 총 9명이 같은 시각에 검사실로 방문하였다. 이들은 검찰청사와 검사실까지 들어온 다음에야 비로소 경계를 풀고 안심하는 듯했다. 먼저, 기소중지 재외국민 특별자수기간 제도의 취지와 당사자들을 부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재기신청인의 형을 소개해 줬다. 그리고 대기실에 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눠 보고 다시 오라고 했다. 약 30분 지나서 피해자들 일행과 재기신청인의 형이 검사실로 들어와서 피해자 일인당 500만 원씩 총 2,000만 원에 모두 합의하고 즉시 그 금액을 수수했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피해가 발생한 후 20년이 가까이 지난 시점이니 화폐가치나 이자를 고려해서 수표 액면가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요청할 법도 했지만,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돈을 받게 된 피해자들이 어느 정도는 양보한 측면이 있었다. 


 검사실로 오기 전까지 그렇게 경계하고 주저하던 사람들이 막상 검찰청을 방문하여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채권을 예상치 못하게 회수하게 되자, 일종의 횡재처럼 여겨졌는지 나와 검사님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들을 탓할 일도 내가 딱히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일도 아니었다. 그저 수사기관을 사칭해서 금융범죄 사기를 치는 보이스피싱 일당이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합의가 성사되어 재기신청인의 사건은 기소중지 상태가 해제되고 새로운 사건번호가 부여되는 재기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이후 검사님이 부정수표단속법 규정에 따라 ‘공소권 없음’이나 ‘기소유예’ 처분을 하였다. 위 사건을 배당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사건과 직원은, 기소중지 재외국민 특별자수 사건에서 피해자 가족관계증명서까지 발급받아서 연락을 취하는 등 업무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과 검사실은 처음 봤다며 놀라워했다. 그런데 처음에 피해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알아보지 않고 중단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식의 일 처리라면 피해자의 피해회복(비록 피해자의 머릿속에는 잊힌 사건이었을지라도)과 재기신청인의 법적 지위 안정화는 영원히 요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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