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우리들의 안주거리, 가십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예전 대학을 갓 졸업했을 무렵, 비슷한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대학 동기들이 모이면 종종 그런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회사라는 조직에는 가십거리가 정말 많다고. 반면 나는 줄곧 10명 남짓의 작은 조직에 있다 보니 그런 얘기들이 주는 재미는 강 건너 이야기였다. 별로 감도 안 오고 쿨하게 '남의 이야기 알아서 뭐하나'싶은 생각이었다.

'가십(Gossip)'이라는 단어가 주는 풍미는 별로 긍정적이진 않다. 누군가가 숨기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왠지 캐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글로 '가십'이 아니라 영어로 Gossip이 되는 순간 이야기의 영역은 바뀐다. 단지 남녀에 얽힌 '카더라'급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접하는 접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급여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이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 사는 데가 거기서 거긴지 글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한국사회의 가십은 이곳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미국 드라마 ‘그레이즈 아나토미(Grey‘s Anatomy)'를 10년 넘게 지켜보는 애청자로서 시애틀의 한 병원을 배경으로 한 의사들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뭐 물론.. 총기 테러와 같은 당시 사회의 큰 관심사와 같은 소재는 별도로 치자.)

호기심. 거창하게 인류문명의 발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상의 효자손 역할을 하는 가십거리를 굳이 어둡게 묘사할 필요는 없다. 넘실대는 아메리카노와 같은 일상에 한 숟갈의 설탕 같은 정도만 섭취하면 적절하다.


지금부터 시작할 ‘소설’은 분명한 묘사와는 정반대 되는, 최대한 불분명하고 흐릿한 묘사를 위해 허구를 포함, 본인 마음대로 꾸며낸 내용도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게 도대체 누굴까 보다는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 정도면 오케이다.

Schloss Charlottenburg / Johann Arnold Nering / 1699 ©HK Shin

가십 1부의 주인공은 리스본 출신의 A이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 6-7개월 정도 뒤에 일을 시작한, 나와 같이 독일어를 못하지만 영어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었다. A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1년여 남짓 근무를 하고 퇴사를 했다. 그러나 기계에 가까웠던 그를 대체할 인력을 결국 구하지 못해 몇 달이라도 다녀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오갔고 그렇게 그는 베를린 몇 달, 리스본 몇 달을 오가는 오랜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A와 나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비슷한 상황을 지난 사람이라는 동지애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뜨내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직장에서, 사석에서 이래 저래 보며 양으로도 많은 시간 동안 많은 사건들을 함께한 동지애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에도 언뜻언뜻 서로가 속 깊은 이야기들을 했고 그렇게 신뢰를 쌓았다. 물론, 내가 스페인에 살았던 기억이 A와의 관계 형성에 많은 도움을 줬다. 같은 '이베리아 반도'를 배경으로 음식이나 언어, 사람들의 성향 등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A는 그레이즈 아나토미에 나올 듯한 사내 연애를 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개인생활과 직장생활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던 A에게 난 지나가는 이야기로, '너는 내가 여태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유럽인 같아'라고 했고 껄껄껄 한바탕 웃은 A는 눈을 찡그리며 '칭찬으로 받아들일게'라는 여유까지 부렸다. 살짝 조미료를 섞자면 A는 베를린에 올 때마다 사무실의 '썸'뿐만 아니라 퇴근 후의 '썸'까지 얽혀 있는 바쁘디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헤매던 A의 마음이 정착할 즈음, A는 A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태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자신의 '썸'을 먼 타지에 사는 아버지가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2주 정도 태국을 다녀온 A에게 난 어느 '썸'보다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젊었을 때 복싱선수였어. 프로가 되지 못한 선수였어. 그래서 였는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항상 주먹이 앞서곤 했지. 물론 거기엔 나, 어머니, 할머니도 있었고 말이야. 그러다 결국 어머니는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집을 떠났어. 그렇게 할머니가 나를 키운 거야. 그런 아버지가 멀리 태국 어디에서 누구와 결혼하고 산다는 얘기는 진작에 할머니에게 들었어. 처음에 태국여행을 가려고 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도착해서 만나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해졌어. 괜한 짓을 했나 싶은 후회도 됐지. 그런데 아버지가 나에게 사과를 했어. 미안하다고. 정말 의외였어'


매일 명량하던 A는 사실 마음의 상처를 미소로 감추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난 주변의 지인에게 이런 속 깊은 이야기를 듣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A에게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야기해버렸다. '다녀오길 잘했네'라고.


Hackescher Markt ©HK Shin

가십 2부의 주인공인 B는 서독의 깊숙한 내륙지방 출신이다. 굳이 '내륙지방'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왠지 B가 외부인, 혹은 외지인들과 별로 접촉이 없어 보이기도 한 탓이다. 겉으로 아주 센 척을 하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방어적인 태도에 대해 B는 유년시절의 복잡한 기억 때문이라고 술김에 이야기하기도 한다. 보는 듯 안 보는 듯, 듣는 듯 안 듣는 듯,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알다가도 모를 듯한 B와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첫인사를 한 지 3여 년이나 지난 뒤였다. 별로 같이 일할 기회가 없다 보니, 그리고 영어에 심한 알레르기 증상을 가진 B이다 보니, 매일 지나치듯 의무적으로 물어보는 안부 외의 이야기를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B의 주변에는 항시 모든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다니는 안테나들이 많다.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게 되는 걸까 아님 긴 시간 어울리다 보니 같이 동화된 것일까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구석들이 많은 사람들의 구성이다. 대체 그런 정보들은 어떻게 접근이 가능한 걸까 같은, '정말? 진짜?'와 같은 감탄사를 여러 발 탑재해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너 지난번 C가 하던 프로젝트 알아? 뮌헨에 하던 거 그거 있잖아. 그거 정말 취소됐데. 시에서 허가까지 거의 문제없는 분위기였는데 내부적으로 의견이 안 맞아서 진통을 겪더니 결국 엎었데."

"진짜? 그럼 그거 하던 C는 어떻게 되는 거야?"

"몰라. 안 그래도 작년부턴가 급여 때문에 회사랑 사이 안 좋더니 이 김에 회사 때려치우고 나간 데나 봐. 자기 사업한다고."


이런 식이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가끔씩 B와 맥주를 한 잔 같이 하게 되면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 저 포인트에서 그런 질문들을 할 수 있다. "급여가 뭐 어땠길래 그랬데?"


물론 B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십들도 있다. 아주 흥미롭게도 이런 얘기는 B의 안테나로부터 듣는다. B와 아주 뜨거운 사내 연애를 하다가 헤어진 뒤 퇴사한 D와의 이야기이다. 한 번은 저녁 9시쯤, 모두 퇴근하고 혼자 야근을 하던 밤, 술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D가 갑자기 사무실로 나타나 나에게 B는 집에 갔냐며 물어보는 일이 있었다. 난 속으로 '뭐야, 둘이 헤어진 거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곤 이내 잊어버렸다. 그 뒤 B의 안테나와 우연히 이야기하다가 맞춰지지 않은 채 처박아놨던 퍼즐이 속 시원하게 착착착 저절로 맞아 들어가는 듯한 희열을 느낀다. D가 최근에 B에게 심한 집착을 하고 있었다 한다. 둘이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결국 D는 퇴사했고 난 그 뒤로 D를 보지 못했다.



"가십은 잡담이라는 큰 틀에 속해있는 반면, 루머는 단순히 확인되지 않은 '정보'만을 뜻한다는 점에서 뜻이 대조된다. 뒷담화와 일맥상통한다."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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