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참 쓰고 나니 씁쓸하다. 내가 말한 엑스맨은 마블의 엑스맨이 아니라 2003년쯤에 SBS에서 방영했던 예능프로그램에서의 엑스맨을 말한 것이다. (하아... 요새는 뭘 해도 아재의 향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내 머리와 입에 붙은 엑스맨은 마피아 게임에서처럼 작정하고 상대방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스파이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자신은 당신과 동일하다고 스스로의 결백함을 아주 강하게 자주 주장하는 엑스맨들은 꼭 결정적인 순간에 대형사고를 친다. 물론, 이런 종류의 빅엿이 그들의 최종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감히 '엑스맨의 법칙'이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과 '369법칙'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글로벌하게 어느 사회의 어느 환경의 직장에서도 적용 가능한 강력하고 절대적인 법칙이라 주장하고 싶다. 한국의 아재가 베를린의 회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의 엑스맨에 의해 빅엿을 먹었으니 나는 목격자가 되는 셈이다.
작년 연말 12월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할 공모전에 한창 매달려있었다. 뮌헨(München)의 외곽지역에 새로 조성되는 대규모 주거단지에 세워질 4개의 건물에 대한 공모전이었다. 2동은 주거, 1동은 사무실, 1동은 호텔로 사용될 계획이고 기본적으로 저층부에는 상업시설이 들어서는, 뭐 이것까지만 보면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공모전이었다.
보통 이렇게 몇만에서 몇십만 제곱미터의 대규모 건축공모전은 '투자회사'가 공모전을 주최하는 건축주가 된다. 자연스레 그에 따라 제출물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 공모전의 특이점은 다양한 스케일로 다양한 도면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건축적인 계획 못지않게 제출물들에 대한 일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초반에는 4명의 인원이 하나의 건물을 맡아 계획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몇 주 시간이 지나 나를 비롯한 서너 명이 더 투입되었다. 그러나 시기가 연말인지라 모두들 연말연시 계획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몇 명은 마감을 앞두고 휴가를 출발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임신 중인 아내와 연말에 베를린에 머물기로 했고 덕분에 필연적으로 마감 때까지 모든 과정에 참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보통 연말에 주최되는 공모전은 크리스마스 휴가 전에 모든 제출을 끝내거나 1월 말로 제출 일정을 잡곤 한다. 다행히 이 공모전은 찝찝하지 않게 12월 21일 마감이었고 마침 12월 22일은 사무실 전체 회식 날이었다. 그러니 열심히 달려서 21일에 손을 탁탁 털고 22일에 즐겁게 회식을 하고 23일부터 각자의 휴가를 즐기면 되는 명쾌한 일정이었다. 물론 이 공모전의 과정에 계속 섞여 있던 우리의 엑스맨인 N은 아주 자주 팀에 잡음을 만들고 있었지만 N의 이런 행동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아주 자연스러웠고 그의 이런 행동들에 모두들 꽤나 굳은살이 박인 상태였다.
N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내내 자리가 자주 바뀌었다. 불행히도 바로 옆, 앞의 동료들과 사이가 안 좋아져서 그랬다.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기도 하고 어떨 때는 N과 다툰 다른 직원이 씩씩거리며 나에게 와 신랄하게 N의 욕을 한 적도 있다. 결국 N이 일하는 방식에 의한 충돌이었다. N의 가장 큰 문제는 정확히 언제 일이 끝나는지 스스로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떤 도면을 그린다고 하면, 그 도면을 직접 그리는 본인과 옆에서 그 일을 관리해주는 사람은 정확하게 얼마 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일을 시키는 사람도 일을 하는 사람도 '시간계획'이란 걸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N이 5개의 도면을 그리겠다고 하면 그건 1개의 도면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결국 시간이 임박해서야 주변의 도움을 청한다. 그래서 N에게는 매번 수없이 묻고 물어야 했다.
'너 이거 시간 맞춰서 할 수 있겠어? 지난번 단면보다 좀 더 복잡한데 그때는 3일도 부족했잖아.'
'(눈을 못 마주치고)할 수 있어. 아직 시간 있으니까 내가 해볼게.'
이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며 '결국 저거 그리다가 끝나겠구나'싶은 서늘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불안한 예상은 늘 '현실'이었다. 항상 마지막 순간에 '지지(GG: Good Game의 약자로 스타크래프트에서 게임을 끝낼 때 많이 썼다)'를 외치는 N도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해야 하니 나는 최대한 자세하고 명확하게 일을 전달한다. 그러다 결국 몇 번의 경험을 통해 N에게 조만간 필요하게 될 도움까지 염두해야 하는 지경까지 됐고 이는 명백히 팀원 모두에게 스트레스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몇 번 반복된 후에 결국 N은 공모전이 아닌 다른 업무를 하게 되었고 그 뒤로 나는 N과 일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 후로 거의 2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 도저히 할 게 없는 N이 공모전에 다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없는 덕목인 천역 덕스러움이 N에게는 있다. '걱정 마, 이번에는 잘 될 거야.'라고 나에게 하니 뭐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드디어 12월 21일 마감날이 되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제출 패널의 레이아웃도 다 정리가 됐으니 이제 각자 맡은 도면 및 이미지들을 최종 업데이트해주면 되었다. 각자 한 두 명씩 자신의 맡은 바를 끝내고 퇴근을 재촉하던 18시 즈음이었다. 출력도 이미 시작되었다. 모두들 패널 출력 외에 면적 등 필요한 엑셀 파일에 열중 중이었다. 사실 너무 순조로운 편이어서 제출물을 가져갈 택배도 3시간이나 앞당겨 21시쯤에 벌써 예약해 놓았었다. 그러던 19시쯤이었다. 공모전을 같이 하던 다른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N이 집에 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
'응? 집에 간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다급하게 N의 자리로 가 보니 나의 상사 J가 콧수염을 씰룩이며 서 있다. 그에게 내가 묻는다.
'진짜 집에 갔어?'
'N한테 뭐 물어봐야 해서 찾았더니 몸이 안 좋다고 나갔다는 거야.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몸에 무슨 바이러스가 있어서 사무실에 더 이상 못 있겠다던데.'
난 그 상황에서 크읍하고 웃을 뻔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진짜 그 단어를 사용했어? 바이러스라고?'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끄덕끄덕'
긴급 작전이 필요했다. 그 순간은 화도 나지 않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모두 몰입했다. 도면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황이었지만 면적을 확인해야 하는데 사실 직접 그린 사람 이외에 누가 더 잘 알겠는가. 결국 다른 누군가가 면적 표와 도면을 대조해 보며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다른 2명의 직원이 달라붙었다. 그리고 2시간이 흘렀을까. 미루고 미뤄둔 00시 택배 직원의 방문이 다가오고 있었다. 흑빛이 된 그 2명이 결국 수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 차이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딘가 심하게 안 맞는 계산을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확인을 해야 하는데 마음은 급하고 시간이 없으니 그게 될 리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면적 표를 보내고 다음날 오전에 주최 측에 전화를 해야 했다. 사정이 이래이래 해서 면적 표를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하는데 보내도 되겠냐고. 일단은 보내라는 말에 결국 우리는 규정을 하나 어긴 채로 면적 표를 따로 제출하게 됐다.
그리고 그다음 날, 사무실 전체 회식 날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 앉아 수군거렸다. 과연 N이 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너무나 뻔뻔하게 화려한 모습으로 N은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하룻밤만에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말이다. 대단원의 마지막이었다. N이 바로 엑스맨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도대체 이렇게 일을 못하는 엑스맨인 N이 어떻게 동료들의 혹독한 채찍질에도 끝까지 사무실에 있게 되었을까? 사실 사무실에선 모스크바에 어마 어마한 규모의 주거 단지를 계획 중이었고 우리나라의 기본 설계에 해당하는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한 30~40% 정도 진행이 된 셈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건축주팀과 영어로 소통했지만 우리의 엑스맨은 항상 화려한 러시아어로 그들과 직접 소통을 하곤 했다. 그러니 그 프로젝트가 엎어져서 먼지가 되지 않는 이상 누군가 러시아어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다들 답답한 마음에 러시아 사람을 찾아 헤맸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그 틈에서 N은 살아남은 것이다.
사실 작년 연말의 이 사건은 '경위서'를 작성해서 보고해야 하는 정도의 심각한 사건이었다. 만약 제대로 제출이 되지 않았다면 두어 달 동안 공모전에 인력을 배치한 사무실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N은 아직도 숨을 살살 쉬며 사무실에 잘 다니고 있다. 연말 휴가에서 돌아와 새해를 시작하며 난 나의 의견을 사무실에 분명히 밝혔다. N과 다시 일하고 싶지 않다고.
다행히 앞으로의 공모전에서는 N을 다신 볼 것 같지 않다. 모른다, 지금은 또 다른 팀에서 활발히 엑스맨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