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동료의 장례식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지금 일하는 사무실에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사무실을 운영하겠다고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꾸준히 이어지지 않는 일의 양과 대체인력을 구하지 못한 사무실의 입장이 교차되어 그는 '종종' 우리 사무실의 공모전을 하나씩 맡아서 하곤 했었다. 제출을 위한 모든 절차는 재직 당시의 형식으로 그대로 유지하되 근무 형태는 자신이 편한 데로 알아서 결정하는, 원하면 사무실에 휴가 간 사람의 자리를 써도 되고 아니면 자신의 사무실에 일을 가져가서 해도 되는 '이상적인' 프리랜서의 형태로 말이다. 워낙 사무실에 익숙한 사람이다 보니 그가 가끔 사무실에 들르면 특히나 오래 근무한 사람들과 두런두런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와도 그렇게 공모전을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내가 몇 번 도움을 주기도 하고, 내가 도움을 받기도 했다. 2015년 정도까지 사무실에서 꽤나 자주 마주치곤 했었는데 그즈음부터 그는 자신의 일이 바빠져 조금씩 소식을 들을 일이 적어졌다. 그리곤 1년에 한 번 정도씩 연말 파티에서 잠깐 마주치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그가 2018년, 그러니까 작년에 스위스 취리히(Zürich)의 대규모 대학 캠퍼스 공모전을 위해 사무실에 거의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 워낙 규모도 있고 복잡한 프로그램에 복잡한 과정이라고 것만 건네 들었다. 아쉽게도 난 다른 업무로 인해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사무실로 올라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에게 난 '점심 맛있게 먹어!'라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로 돌아와 근무를 시작했다. 그리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사무실 한쪽이 우당탕 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주변 동료들은 '무슨 일이지'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했고 바로 다음 순간 난 조심스럽게 웅성거리는 쪽으로 향했다. 닫혀 있는 회의실 문 너머로 책상에 누워, 응급요원들에 빙 둘러싸인,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를 많은 사람들 사이로 보아버렸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나도 너무 당황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지'와 '어떻게 된 거지'가 번갈아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나중에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옆으로 힘없이 푹 쓰러지더니 발작 증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주변 동료들이 재빠르게 응급차를 부르고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그는 의식을 잃은 채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 날 오후 내내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직원들은 할 말을 잃은 채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너무나 처음 보는 광경에 나도 손이 떨렸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와 함께 병원으로 간 동료가 퇴근 즈음에 전체 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병원에 도착한 후 의식을 되찾았고 지금은 가족과 함께 병실에 있다고. 그의 담당의는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좀 더 관찰해 보자고 했다 한다. 정작 본인은 평소에 발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처음 겪어본 상황이니 별 거 아닐 거라고,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며칠이 지났을까, 내 옆 자리의 동료에게 그의 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뇌에 종양이 발견됐는데 자리가 너무 깊어서 수술을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한다는 얘기도, 그리고 담당의는 최악의 경우까지 고지했다는 이야기도 말이다. 너무 모든 것이 빨리 흘러가고 있었다. 많아지는 생각을 다 헤아리지도 못하는 사이 새로운 생각들이 생기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며칠 뒤 나는 검은색 초대장을 받았다. 그와 가장 가까웠던 동료는 전체 메일로 그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알렸다.


38살이 될 때까지 난 장례식장에 많이 가보지 못했다. 16살 때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내 기억의 거의 전부이다. 그 뒤 22살에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등지셨을 때도 나는 군 복무로 함께하지 못했고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장례식도 모두 외국에 있던 관계로 함께 하지 못했다. 대학에 다닐 때 몇 번 들렀던 장례식장의 기억이 전부였다. 병원의 장례식장에 가 부주를 하고 상주와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장례식 말이다.

유럽의 장례식은 영화를 통해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경험도 없고 무지한 탓에 슬픔과는 별개로 장례식 자체에 대해 별로 감이 안 왔다. 그러나 그 '감'은 장례식날 아침 출근길에 검은 양복을 입으며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진짜 그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그의 모습이 마지막이었구나.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도 얼마나 급작스러웠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베를린에는 시내 곳곳에 공동묘지가 많다. 그의 장례식도 시내 중심가의 공동묘지의 예배공간에서 진행됐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온 사람들이 시간이 되자 예배공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협소한 예배공간에는 가족과 친지들이 주로 앉았고 나는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조용히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나는 그가 좋아하던 노래라는 노래가 공간에 울려 퍼지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장면과 유사했다. 공간의 중심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 커다란 그의 사진이 걸린 액자가 그와 함께 놓여있었고 그 공간을 노래가 차분히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말없이 우리 전부는 그의 사진을 보며 그 노래에 집중했다. 장례식 동안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5곡 정도를 들은 것 같다. 그가 좋아했던 노래를 다 같이 듣고 그의 가족들이 유족을 대표해 손님들에게 편지를 읽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노래를 한 곡 또 듣고 이번엔 가족들이 떠나는 그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다 함께 그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것이 식의 순서였다. 그 편지들 사이에 평소 유머를 즐기던 그의 성향이 담긴 신나는 레게 노래도 들었고 너무 담담해서 슬픈 노래도 들었다. 그 날, 나는 내가 진작에 독일어를 더 열심히 배웠더라면 사람들이 어렵게 써 내려간 편지에 담긴 감정들과 노래의 가사는 물론 그의 유머를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자책했다. 이때 아마도 독일어를 늦게 배우기 시작한 것을 처음 후회했던 것 같다.

첫 번째 순서가 끝나고 그가 누운 자리에 조문객들이 돌아가며 장미를 건네는 순서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의 2살이 안된 아들을 봤다. 정작 그 어린 갓난쟁이가 그의 아들이라는 것도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전해 들었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거리의 모습을 보며 그때의 감정을 돌이켜본다. ©HK Shin

나는 장례식장을 나와 다시 사무실로 향하며 감히 나의 장례식장은 어떨까 상상을 해봤다. 나의 장례식장에 올 조문객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래서 사람들이 유서를 쓰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체류비자가 없었던 32살에서 34살까지 나는 사실 핸드폰에 유서를 가지고 다녔다. 아무런 사회적 보장장치가 없던 체로 살던 때라 정말 길에서 차에 치이면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유서라 생각했다. 매 해가 시작되면 한 번씩 업데이트를 하곤 했는데 대부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몇 년 동안 손 놓았던 유서를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업데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신변 상황에 대한 업데이트이기도 하고 미쳐 공유하지 못하거나 빠질 수 있는 내용을 가족과 공유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느낀, 나의 장례식장에 나처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왔을 조문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크다.








2018년 4월 우리 곁을 떠난 말테(Malte)를 기억하며.


이전 10화베를린, 오늘의 점심메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