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필리핀 여행기(7)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 네 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전날 온라인으로 앙코르 패스 7일권을 미리 끊어 놓고, 비교적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다음날이면 드디어 앙코르 와트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잠을 계속 설치다가, 이렇게 제대로 못 잔 채 무리해서 앙코르 와트를 보러 갈 바에야 일정을 하루 미루자 싶어서 결국 휴대폰 알람을 꺼버렸다. 그런데 오늘 꼭 다녀오라는 하늘의 계시인지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딱 네 시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다녀오자 싶어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네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에 숙소에서 나왔다.
앙코르 와트까지는 시내에서 거리가 꽤 되는데, 나는 캄보디아의 교통 애플리케이션인 PassAPP으로 툭툭을 불러 타고 가기로 했다.(그랩도 이용 가능하지만 패스앱으로 예약하는 게 보다 저렴하다.) 예약하자마자 바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툭툭 하나가 3분도 안 돼서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앙코르 와트로 일출 보러 가는 관광객들이 많은지 거리에 사람도, 차도 꽤 많이 보였다. 어두워서 바깥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신비롭고 설레는 기분으로 15분 여를 달려 4시 50분경 앙코르 와트 서쪽 출입문 앞에 도착했다.
직원에게 온라인 패스를 보여주고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니, 곧고 넓은 길이 일자로 쭉 나있었다. 앞서 가는 관광객들을 따라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앞으로 걸어가다 보니 넓은 강과 그 위를 가로지리는 다리 하나가 보였다. 앙코르 와트를 둘러싸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깊고 넓은 해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큰 규모 때문에 해자가 아닌 자연적으로 생긴 강이나 호수처럼 보였다. 강(이 아닌 해자) 가운데 놓여있던 다리는 무지개다리라는 이름으로, 그 다리를 건너서 앙코르 와트 1층 구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앙코르 와트 뒤편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하나 있는데, 늦게 도착하면 좋은 자리를 못 얻을까 봐 다리 위 수많은 물웅덩이들을 피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열심히 걸어가다 보니 다리가 끝나는 지점 바로 앞에 있는 앙코르 와트의 서쪽 정문 윤곽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일단 일출 장소까지 가는 것이 시급해 서쪽 정문의 감상은 일출 뒤로 미뤄두고, 정문을 빠르게 지나 양쪽에 나란히 파여있다는 사각형의 연못 두 개를 찾아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걸었던 것보다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연못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방문한 날 기준으로 두 개의 연못 중 왼쪽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기 때문에, 오른쪽 연못을 앞에 두고 앙코르 와트를 쪽을 바라보면 연못 수면에 앙코르 와트가 반사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연못 앞자리 중에서도 키가 큰 두 개의 나무 사이로 앙코르 와트의 아름다운 탑 다섯 개가 나란하게 온전히 보이는 지점이 명당 중의 명당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어느 자리를 잡아야 할지 알지 못해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는데, 단체 관광객을 이끄는 가이드 한 명이 바로 그 명당에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그쪽으로 갔을 땐 이미 나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그 오른편 빈 공간에 자리를 잡고 다가올 일출을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다. 앙코르 와트의 탑들 중 오른쪽 두 개가 나무에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첫 시도에 이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5시 40분으로 예정된 그날의 일출 시각이 점점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관광객들 숫자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의 좌우뒤쪽도 다른 관광객들로 가득 찼고, 나도 그들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대감으로 상기된 얼굴로 일출의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거나 함께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갑자기 서양인 여자 두 명이 내 앞을 비집고 들어와 내 시야를 방해하는 곳에 억지로 자리를 잡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중 한 명은 나보다 키도 훨씬 컸다. 순간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와도 같은 이곳에서, 사이공과 프놈펜을 거쳐 순수 이동 시간만 24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이곳에서, 50만 원 상당의 소매치기를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바로 이곳에서, 제대로 된 관람 시작도 전에 평점심을 잃고 기분을 잡쳤다는 것이 더 짜증이 났다. 이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조용하고 평온하게, 이 신비롭고 성스러운 장소를 마음껏 눈에 담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짓을 한 그들에게 나의 짧은 영어로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어렵게 잡은 자리를 포기하고 사람들 가장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등바등 조바심 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좋은 자리를 사수하는 것보다, 그냥 다 내려놓고 마음 편히 수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랑 함께 감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다 보니, 기다렸던 5시 40분이 되었다. 거기서 몇 분 더 흘렀지만 앙코르 와트 뒤편의 하늘만 빨갛게 밝아질 뿐 해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구나, 이렇게 나의 첫 앙코르 와트에서의 일출관람 시도가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미련 없이 자리를 뜨고 급하게 자리 잡으러 오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무지개다리와 드넓은 해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족히 열 명은 되는 수의 가이드, 툭툭기사, 사진기사 등의 호객을 만났다. 호객을 뿌리치며 해자가 있는 곳에 거의 도착했을 때, 주위가 환해져 뒤돌아보니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구름에 숨어있던 해가 언제 고개를 내밀었는지 환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빨리 미련을 버린 것을 후회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오전 6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아마추어 여행기입니다. 부정확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해서 재미로 읽어주시고, 궁금한 내용은 댓글 남겨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