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8)
발리의 해변을 너무 일찍 떠나는 것 아닌가 했던 괘념은, 떠나는 당일이 되니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 살포시 덮어주었다. 전날 예약했던 꾸라꾸라 버스를 타기 위해 근처 정류장으로 갔다. 우붓에 닿으려면 약 두 시간여를 북쪽으로 달려야 한다. 꾸따가 있는 바둥군에서 발리섬의 주도 덴파사르를 거쳐, 우붓이 있는 기안야르주에 접어들 무렵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습기와 빗방울 자국으로 얼룩진 버스 유리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열대지방 특유의 짙은 녹음 사이로, 길켠에 자리 잡은 건물들의 검게 바랜 주홍색 기와와 사원의 갈색 벽돌 장식이 눈앞을 교차하며 지나갔다. 낮 시간이었음에도 왠지 어두침침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건 아무래도 날씨 탓이었을 것이다.
버스의 목적지인 우붓 중심가에 점점 가까워지니, 이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약간의 교통정체 덕분에 버스 안에서 우붓 시내를 찬찬히 구경할 수 있었다. 창밖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초록의 비중이 확 줄어든 반면, 왕복 2차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와 오토바이 행렬과 차로 주변에 빽빽이 들어선 식당 및 상점가, 그 안팎을 누비는 다양한 피부색의 관광객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발리섬 내륙의 우거진 열대우림 속에도 꾸따 거리의 번화한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훌륭한 자연경관과 매력적인 문화는 관광객을 모으고, 자연스레 관광산업이 발전하며 지역이 상업화 도시화되는 건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어느새 버스의 목적지인 푸리 루키산 미술관(Museum Puri Lukisan) 앞 공터에 도착했다. 최종 목적지인 숙소는 우붓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2~3km 정도 떨어진 사얀(Sayan) 마을에 있어, 하차 지점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구글 지도를 보니 차로는 25분가량 걸리는데, 질러서 가는 길을 이용하면 오토바이론 10분, 걸어서는 30분 조금 넘게 걸리는 걸로 안내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쓴다는 택시 앱인 고젝(Gojek)을 다운로드해 놓긴 했지만, 주소 입력에 결제수단 등록 등 그 과정이 귀찮기도 했고, 동네 구경도 하며 근방 지리도 익힐 겸 걸어서 이동해 보기로 했다. 아까부터 내리던 비가 계속 오는 중이었어도 부슬비 수준이라 걷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캐리어 대신 배낭을 새로 구매한 것도 이처럼 마음껏 걷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배낭여행객 기분을 실컷 내면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초반엔 약간 좁고 울퉁불퉁 하긴 했지만, 차도와 구분된 인도가 설치되어 있어서 수월히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심가를 살짝 벗어나니, 인도는 느닷없이 사라지고 차와 오토바이가 다니는 도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생소한 경험은 아니어도 맞닥뜨릴 때마다 항상 불편하고 위험한 이 환경. 이동수단이 없으면 앞으로의 한 달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중에 경사가 심한 구간도 드문드문 있었고, 구글 지도로 확인했던 질러가는 길은 딱 오토바이 한 대만 지나다닐 만큼 비좁았다. 비 때문에 발밑도 미끄러운 데다가, 앞뒤에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 때문에 귀를 쫑긋 세운 채 계속 긴장하며 걸어야 했다. 부슬비도 강해졌다 약해졌다 했는데, 이러다 별안간 폭우가 쏟아질까 싶어 마음도 급해졌다. 하지만 비에 젖는 것보다 안전이 더 우선.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레 내디디며 지도가 안내하는 대로 나아갔다.
그렇게 집중하며 30분가량을 걸었을까. 마침내 숙소가 있는 동네로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땀과 비로 몸은 축축하고 어깨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걸으며 살펴본 동네의 첫인상은 현지 사람들의 생활 터전과 관광지, 자연과 문명이 어느 정도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공간인 듯했다. 요란스럽지 않은 분위기의 주택가와 상점가가 있는 거리를 지나쳐 길목을 빠져나오니, 갑자기 푸른 논밭이 쫙 펼쳐진 장소가 나타나기도 했고, 군데군데 말쑥한 느낌의 카페나 채식 식당, 고급 빌라와 리조트도 보이곤 했다. 비록 파도 소리, 바다 내음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내륙 한가운데지만, 이러한 동네 정경을 보니 우붓에서 보낼 시간에 약간의 기대감이 더 얹어졌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주택 한 채를 집주인과 몇 명의 이용객들이 함께 공유하는 게스트하우스로, 비교적 조용한 주택가 골목 끝에 위치해 있었다. 얼핏 봐선 현지인이 살고 있는 일반 가정집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마당이 딸린 2층짜리 현대식 건물이라 그런지 이웃집들에 비해 다소 좋아 보이긴 했다.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하얀색 중형견 한 마리가 경계하는 건지 반겨주는 건지 모르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어제 읽었던 숙소 설명 중 사랑스러운 개 두 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대목이 떠올랐다. 개에게 조심스레 눈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자는 듯 엎드려 있던 검은색 큰 개가 날 보더니 갑자기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생김새도 그렇고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개의 태도에 아연실색하여 엉거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으니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방에서 나와 개를 진정시키고 날 맞이해 주었다.
주인장은 아주 사교적이고 쾌활해 보이는 발리 현지 아저씨로,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각자 자기소개를 한 뒤, 간단히 집을 안내받았다. 1층의 거실과 주방은 공용 공간이니 언제든 마음껏 사용하면 되고, 거실에 엎드려 있는 개는 원래 착한 아인데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는 해명을 들었다. 그다지 안심이 되진 않았지만 개 주인이 그렇다는데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주인장은 마지막으로 나의 방 위치를 알려주고, 운동 갈 시간이 됐다며 언제든 필요하면 왓츠앱으로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내가 한 달간 지낼 방은 건물 출입구 바로 왼편에 있는 화장실이 딸린 널따란 방이었다.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무겁고 꿉꿉한 공기가 피부에 닿으며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높은 층고에 대리석 바닥으로 된 원룸 형태의 공간에 넉넉한 크기의 침대와 철제 책상, 나무 옷장이 하나씩 있었다. 창문은 여러 개 있었지만 채광이나 통풍의 역할은 크게 못해주는 것 같았고, 욕실 겸 화장실은 넓긴 했으나 금이 간 타일들과 타일 사이사이에 검은색 물감으로 덧칠한 듯한 곰팡이 때들이 눈에 바로 띄었다. 에어컨은 최저 온도로 설정해도 시원함과 미지근함 어느 사이에 있는 온도의 바람이 나왔고, 문이 세 개 달린 큰 옷장 문을 여니 세 곳 모두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끝까지 닫아도 벌어져 있는 방문 틈 사이로 빛이나 소음, 모기까지 자유롭게 드나드는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기까지 확인했을 때 이것 참 낭패로구나 싶었다.
다행히 침구류와 수건은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편에 냄새도 좋았다. 혼자 쓰는 방에 화장실도 딸려있고 크기도 넉넉하니, 여행 첫날 묶었던 호스텔에 비하면 아주 선녀지만, 문제는 여기서 한 달 동안 지내야 한다는 것. 이제 기댈 곳은 인간의 적응력 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 정을 붙이기 위해 방 안을 다시 한번 가만히 둘러보았다. 그때 귓가에 무언가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강이와 팔뚝 어딘가가 왠지 모르게 가려워지는 그 소리. 잡으려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는데 모기가 높은 층고의 천장으로 도망치는 게 보였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것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방에 대한 적응은 마저 천천히 하기로 하고, 먼저 샤워부터 한 뒤 근처에 저녁이나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