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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체(停滯)에서 벗어나기

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9)

by 부추

우붓 사얀 마을에 도착하고서 첫 사흘 동안은 거의 꿈쩍도 하지 않고 지냈던 것 같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하긴 해야만 했는데, 그것도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하는 것,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생수와 약간의 간식거리를 사는 것이 다였다. 벌써 수년 전에 끝난 코로나 대유행 시기, 그때 종종 하곤 했던 자가격리를 발리에서 재현하고 있었다.


하루에 딱 한 번,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면 슬그머니 외출할 채비를 했다. 방을 나설 때는 가능한 한 조용히 움직이려 노력했다. 까치발을 한 채 뻑뻑한 나무 미닫이문을 살며시 여닫고, 방문 잠금장치에 열쇠를 꽂아 부드럽게 돌려 잠근다. 방문에서 건물 출입구까지는 단 네 걸음이면 닿는 거리, 그대로 몸을 돌려 최단거리로 현관을 빠져나간다. 우붓 특유의 눅눅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녹색 내음을 느끼며, 현관 계단 아래 굴러다니는 신발들 중 내 샌들을 찾아 발을 쑤셔 넣는다. 그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오토바이 주차장을 지나 대문을 나서면 끝. 외출 후 다시 방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로 위 과정을 역순으로 거쳤다.


해외 도피 중인 범죄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방에 콕 박혀 지내고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듯한 이유가 몇 가지 떠올랐다. 먼저 이 숙소에 도착할 때 이미 몸과 마음이 꽤나 지친 상태였던 것 같다. 출국 전 여행을 준비하며, 그리고 기왕의 생활을 정리하며 쌓였던 피로와, 낯선 나라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누적된 피곤이 겹친 부작용.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객쩍은 만남은 피하고 싶었다. 또 며칠 내내 흐리고 비가 쏟아지던 우붓의 궂은 날씨 탓도 얼마간 있었던 듯하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향적, 소극적으로 바뀌어 가는 내 성격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방 자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얇은 칸막이와 커튼으로 분리된 가냘픈 공간이 아닌 단단한 벽과 문으로 보호되는 곳인 것은 좋았다. 낯선 것들 투성이인 여행지에서 이렇게 외부와 차단된 나만의 장소를 발견한 나는, 한참을 굶주린 소 떼가 비옥한 목초지를 만난 듯 이 공간에 빠져들어 갔다. 이 며칠만큼은 방 안의 낡은 가구도, 출처 모를 탁하고 퀴퀴한 냄새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사흘 중 처음 이틀은 너무나 행복했다. 호스텔의 좁은 공용 욕실 대신 나만의 욕실에서 느긋이 따뜻한 물을 틀어놓은 채 씻고, 널찍한 침대에서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몸을 뒤척일 수 있다는 것이. 며칠간 쌓여있던 유튜브 영상들을 이어폰 없이 마음껏 볼 수 있는 것도. 그렇게 빈둥대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열심히 여행한 대가로 밤이 깊기 전 자연스레 찾아오던 노곤한 졸음도 이 방에 들어온 뒤로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새벽 한두 시가 되면 일제히 짖어대기 시작하는 마을 개들의 생태도 알 수 있었다.


안락 속에 깃드는 나태. 사흘째 되는 날에는 화장실 가는 게 귀찮아 물도 마시는 것도 미루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볼만한 유튜브 영상도 없어 멍하니 어두컴컴한 방 안을 둘러보는데,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굳게 닫힌 창문들, 그 위에 드리워진 두꺼운 커튼 틈새로 들어오고 있는 흐릿한 빛. 시계를 안 봤다면 벌써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간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또다시 무계획과 무기력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우선 몸부터 깨끗이 씻고, 이 요물스런 장소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이 두 행동만 완료해도 일단 늪에서 탈출하는 것에 절반의 성공을 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상 그래왔기 때문에.


나머지 절반을 위해 여느 때와 같이 조용히 현관을 나서는데, 마침 마당에 있던 흰색 개가 몇 번 본 사이라고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다. 마주칠 때마다 짖어대는 1층 거실의 사나운 검정 개와 다르게, 이 개는 날 보고 짖지도 않았고 생김새도 순한 녀석이었다. 아직 쓰다듬어 줄 정도로 서로 친분을 쌓은 단계는 아니라 몸짓 고갯짓으로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대문을 나서는데, 기척이 나서 뒤를 돌아보니 흰 개도 뒤따라 대문을 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이 녀석도 바깥에 볼일이 있나 보다 싶었는데, 골목을 얼마간 걸었는데도 계속 내 뒤를 쫄랑쫄랑 따라왔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불편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동행이랄까. 그때 깨달았다. 그동안 '여행은 혼자가 편하다', '누군가의 방해 없이 혼자 다니고 싶다' 되뇌며 돌아다녔지만, 나도 여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골목 끝까지 따라와 주길 바랐지만, 흰 개는 이내 몸을 휙 돌려 집 방향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어스름 내릴 무렵의 동네 골목길


동행의 여운을 간직한 채 전날 갔던 식당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메뉴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우붓에서 한 달 동안의 시간이 있으니 빡빡하게 움직일 것까진 없어도, 매일 약간씩이라도 돌아다녀 보는 게 좋겠다. 내일은 아직 못다 한 이 동네 구경을 마저 해보는 게 어떨까. 미룬 빨래를 맡길 빨래방도 찾아보고, 단골로 삼을 만한 카페도 찾아보자. 식당 창밖의 도로 풍경 보며 내일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새 주문했던 음식인 아얌 그쁘렉(Ayam Geprek)이 나왔다.


닭 다리를 튀겨 그 위에 매운 고추로 만든 소스인 삼발을 올리고, 두부와 콩 튀김인 뗌뻬(Tempe)와 따후 고렝(Tahu Goreng)을 밥과 함께 곁들여 먹는 방식의 음식이었다. 처음 보는 음식을 입안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맛. 처음엔 이래도 여러 번 먹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고, 어쩌면 이 맛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지.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생각하며, 다시 내일 무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식당 창 밖 정경과 아얌 그쁘렉(Ayam Gep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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