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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기 시작한 하루

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10)

by 부추

우붓에 도착하고 나흘째가 돼서야 식당과 구멍가게 방문 목적이 아닌 외출을 하게 됐다. 전날의 자각과 결심이 없었다면 여기서 며칠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외출해서 해야 할 것들 중 가장 시급한 것은 밀린 빨랫감을 세탁하는 것이었다. 지금 지내는 숙소에는 세탁기가 없어서 빨래를 하려면 부득이 바깥 세탁소를 방문해야 했다. 지도에서 숙소와 가장 가까운 세탁소 위치를 찾아보니 5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한 곳이 있었다. 출국 전부터 입고 다녔던 긴 청바지와 얇은 재킷부터 해서, 발리에서 8일 동안 지내며 입었던 여름옷들까지. 그간의 흔적이 어느새 켜켜이 쌓여 있었다. 빨래 바구니 용도로 쓰는 성인 상체만 한 비닐팩 하나를 가득 채운 채, 점심때가 거의 지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집 밖을 나섰다.


숙소 대문과 바로 이어져 있는, 꼭 승합차 한 대 지나다닐 정도의 너비의 골목길 가장자리에서, 빵빵한 비닐팩을 두 손으로 안 듯이 들고 걸었다. 우붓에서도 현지인과 관광객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동할 때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앞뒤에서 오토바이 엔진음이 수시로 들려왔다. 내 옆을 쓱 지나갈 때마다 몸이 흠칫했다. 만에 하나 저 중 하나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다가도, 오토바이 운전자들에게는 좁은 골목길 한쪽을 차지한 채 걷고 있는 내가 거슬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높은 습도와 땀이 잘 나는 체질 탓에,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옷 속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덩달아 불쾌지수도 높아졌다. 지난번 여행 때 오토바이 유무가 교통이 불편한 여행지에서의 경험의 폭을 얼마나 크게 좌우하는지를 실감했었다. 다음 여행 전에는 꼭 2종 소형 면허를 취득해 놓으리라 마음먹었었지만, 미루고 미루다 결국 까먹고 빈손으로 이곳에 와버린 게 떠올랐다.


골목길 끝은 사얀대로(Jalan Raya Sayan)와 연결되어 있었다. Jalan은 도로, Raya는 크다는 뜻의 인니어인데, 사얀대로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왕복 2차로의 아담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얀 마을을 통과하여 발리섬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도로라 그런지 교통량이 많은 편이었다. 도로 양 켠에 식당이나 상점들 또한 주욱 들어서 있었다. 이 도로에 인도가 있을 것이라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막상 와보니 인도는커녕 신호등이나 횡단보도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차로 가장자리에 좁게 나있는 갓길을 인도 삼아 세탁소로 걸어갔다. 가는 도중 곳곳에 소형 싱크홀처럼 움푹 꺼진 구덩이가 함정 마냥 도사리고 있었다. 덤으로 동네 개들도 이 갓길을 애용하는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어서,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신히 행동해야 했다. 세탁소 한 번 방문하는 게 이렇게도 힘든 일이었다니. 지도상으로는 분명 500미터 거리였는데, 체감은 수 킬로 정도는 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목적지인 세탁소에 아무 일 없이 도착했다. 직원 설명을 들어보니 세탁과 건조 외에도 다림질까지 기본으로 서비스에 포함되어 있었고, 가져온 빨래를 하나하나 세서 옷 종류와 개수별로 가격을 책정하는 시스템이었다. 세탁비로 60K 루피아(약 한화 5,100원)를 지불하고, 다음날 이 시각에 찾으러 오면 된다는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끝으로 세탁소를 나왔다. 오늘 외출의 가장 큰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뿌듯하기도 하고 밀린 숙제 해치운 듯 개운하기도 했다. 시간을 확인하는데 벌써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여태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다. 오면서 봤던 몇몇 식당들도 궁금하긴 했지만, 전날 미리 찾아두었던 나시 짬뿌르로 유명한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다시 숙소에서 100미터가량을 더 걸어가야 했는데, 양손이 가벼워지긴 했어도 두 번째 걷는 사얀대로는 여전히 무서웠다.

숙소 앞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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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와 사얀대로


숙소를 지나 식당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푸른 논이 펼쳐져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오리 몇 마리가 논두렁 위에 줄지어 서서 쉬고 있었고, 논 뒤로는 한눈에 봐도 신경 써서 가꾸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주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혼잡한 곳을 벗어나 평화로운 풍경을 보니 금세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논 바로 맞은편에 식당 간판이 보였다. 식당 이름은 Warung Mek Juwel, 사얀 마을 인근에서뿐만 아니라 우붓 내에서도 유명한 식당인 것 같았다. 단일 메뉴이자 대표 메뉴인 나시 짬뿌르(Nasi Campur)를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 석에 앉았다. 식당 경계를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와 이파리 너머로 아까 걸어오면서 봤던 논 조각이 조금 보였다.


방문 시각이 시각인지라 식당이 한산했던 덕분인지,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음식의 첫인상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양념 닭고기 한 조각과 꼬치 요리인 사테 하나, 삶은 달걀 반쪽, 그리고 뭔지 모를 여러 개의 반찬들이 투박하고 무심한 듯이 밥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음식의 이름처럼 밥(Nasi)과 반찬이 마구 섞여(Campur) 있는 것이, 마치 한식 뷔페에서 넓은 접시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았을 때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보기 안 좋은 떡이지만 먹기에는 좋을 수도 있다는 말은 왜 없는지. 맛은 만족스러웠다. 닭고기와 사테는 알던 맛과 비슷해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처음 경험하는 반찬들도 크게 거부감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짜거나 맵다고 느껴질 땐 시원하고 달달한 에스떼(Es Teh)로 입안을 달래주면서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주인 할머니로 보이는 분께 음식값으로 40K 루피아(약 한화 3,400원)를 지불했다. 그리곤 소화 겸 동네 구경을 위해 주변 산책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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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 짬뿌르와 식당 야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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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가는 길의 풍경


3-40분 정도 걷고 있노라니 시원하고 새콤 쌉쌀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간절해졌다. 구글 지도로 후기 괜찮고 비교적 조용해 보이는 카페를 한 곳 찾아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바로 옆집이 더 유명하고 분위기도 좋다고 하는데, 항상 여행자들로 바글바글하다는 내용의 후기가 마음에 걸려 다음 기회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도착한 카페는 조용하긴 했으나, 길가에 너무 딱 붙어 있어서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40K 루피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서 길가 테라스 난간 테이블 앞에 앉았다. 커피 맛은 훌륭하다곤 못하겠지만 마른 목을 축이기엔 충분했다. 좋은 위치와 분위기, 친절한 직원, 그리고 맛있는 커피 이 모든 요소가 마음에 드는 곳이 이 주변에 있을지. 하지만 차차 찾아보면 될 것이다. 느긋이 앉아 길 위의 행인들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아보면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여행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그런 하루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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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며 본 사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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