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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사이다 Nov 19. 2023

죽은 사람이 주는 것들

군인이 고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이제 막 사회에 들어설 나이었다.

부장님이 윗선 지시사항이라고 하면서 직접 검시를 가라고 명을 내리셨다.

직접 검시는 검사가 직접 가서 변사체를 보고 사인을 밝히는 것이다.


첨엔 계장님도 나도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자살이 확실하고 관할도 없는데 웬 직접검시를 가라는 거지?'


원칙적으로 군인의 사망, 비위, 폭행 등 군인 사건의 관할은 해당 '군'에 있다. 그런데 작년 군법이 개정되면서, 군인이 사망한 경우 검사와 경찰이 검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군검사가 지휘하기는 한다. 혹시나 모를 비위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군대를 간 청년들이 여러 가지 일들로 자살하는 사건들이 많고, 어떤 경우 군에서는 이를 덮으려고 한다.(특히, 성폭력 등의 경우는 뒤늦게 밝혀져 뉴스로도 많이 나온다) 실제로 어느 집단이든 상사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고, 자기가 있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논의 끝에 나는 확실한 해결을 위해 국군 수도병원으로 향했다.

매우 먼 거리였다.

도착하니 죽은 군인의 어머니와 아버지, 여동생이 와 있었다.

유족이 검시에 참여한 경우는 처음이어서 긴장이 되었다.

혹시나 실수해서 언짢으시면 어쩌지?

드물게도 인권위에서도 참석했다.

보는 눈들이 수십 개였다.


곧이어 곱게 싸맨 사체가 들어왔고, 감쌌던 보자기를 풀었다.

아직까지 보존된 사체가 얼굴을 드러냈고, 이를 본 어머니가 오열을 했다.

핏기가 전혀 없어 마치 밀랍인형 같았다.


우리는 묵념했다.

슬픈 상념에 젖을 즈음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외침으로 정신이 들었다. 검시가 시작됐다.

CSI팀이 사체의 여기저기를 찍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확인을 엄격하게 확인해야 한다. 타살이 확인될 경우 군사건이 아닌 민간 사건이 되기에 면밀하게 살폈다.


사체의 손목에는 수십 번을 칼로 그은 상흔이 있었는데, 자살을 하려고 하다 실패한 것 같았다.

떨어지며 생긴 타박상 외에는 별다른 상처도, 외부 침입 흔적도 없다.

죽은 이의 아버지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내 아들이 억울함 없이 가야 한다'는 결의에 찬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단호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장면을 보지 않는 게 좋다는 판단하에 의자에 따로 앉아 계시도록 했다.




검시 중, 여러 가지 사인을 추적했는데


유족은 군대에서 괴롭힘을 당한 것 같다고 하고,


군검사는 채무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군 관련자는 변사자가 형사 입건돼서 자살한 것이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이유가 떠돌고, 원망스럽게도 주인공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만은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저 제발 눈을 떠달라고만 했다.




검시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묵념을 하고 사체를 부검하기 전 마지막 인사에(부검을 하면 아무래도 처음 상태로 유지되기 어렵다. 되도록 꼬매기는 하지만)를 했다.

어머니는 쓰러질 듯 오열하여 가족들 손에 실려 나갔다.


그리고 그동안 눈물 한 방울 안 보이던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부여잡으며 말씀하셨다.

"잘 가라"

그 한마디에 잘 참고 있던 우리들 모두 괜스레 위와 뒤를 쳐다보며 눈알을 굴렸다.

아버지는 입으로는 가라고 하면서도 본인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몇 시간 동안의 검시로 다들 지칠 대로 지쳤지만, 누구 하나 재촉하거나 불편해하는 이 하나 없었다.



상을 당한 이에게 정중한 조문을 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덕입니다. 그러나 참척을 당한 에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습니다.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중



괜스레 어머니가 보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단장지애.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아픔이라고 한다.

부모님도 함께 마음 아파하셨다.

'부모님보다 오래 살아야지.'

결심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먹는다.



수녀가 되겠다는 딸을 근심하는 부인에게 말한다. "나는 외아들을 잃었답니다. 그래도 이렇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살아 있습니다." 부인이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황망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몇 마디 사과의 말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부인의 얼굴에 생기가 돈 것을 분명히 보았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구원이었다. 고통도 나눌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나누리라  

박완서 작가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_의사인 아들을 과로사로 먼저 보내고 쓴 에세이





그날은 나도 계장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일을 하고 오면 며칠은 여운이 채 가시지 않는다.

냄새도 오래가서 나라에서 세탁비가 지급될 정도니까.

그런 오래가는 것들은 꼭 자국을 남긴다.


때론 너의 잘못이 없이 인생이 잘못되기도 한다.

그래도 살아라.

잘못된 건 반드시 어떻게든 해결되니까.

아니, 살아있는 한 잘못된 건 없으니까.

그런 자국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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