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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Oct 22. 2020

존재는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하는’ 것이다.

부다페스트에 '살다'



아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고개를 까딱 옆으로 돌리기만 해도 어지럼증이 생겨났다. 덜컥 겁이 나,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고요한 방 안에서 집중할 것이 나 밖에 없어서인지 울렁거림이 더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빈 속에 움직이다간 일 나겠다 싶어 나름 건강한 음식(단백질 풍부한 명란 아보카도 덮밥)을 챙겨 먹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왔다.



난 울적할수록, 더 예쁘게 차려먹는다.



갑자기 모든 것에 신물이 났다. 이런 감정을 오래 지속시키고자 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냥 이러다 말겠지 하고 계속 걸었다.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도 있었다. 모자를 썼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금방 그칠 것도 알았기에 그냥 걷다가 나무 아래로 움직였다.

그 사이 세 명의 친구와 엄마한테 ‘비자 준비, 안부, 나의 컨디션’ 등에 관련된 메시지가 왔다. 온전치 않은 상태로 대답하기가 꺼려졌다. 평소 같으면 이러이러하다,라고 풀어냈을 이야기들이 오늘은 다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반대로 또 내 마음을 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게 누구든지 나의 상태에 대해 터놓아야 했다.

사실 그렇게 힘든 것도 없는데, 그냥 갑자기 모든 것에 이유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이유가 없단 것은 꽤나 난처한 일이다.)

기승전결이 있는 아픔이 아니라 춥거나 배고플 때처럼 느끼는 감정적 허기였다.

세상에 혼자 뚝 떨어진 기분. 뻗치는 모든 손길이 나를 비껴가는 것만 같은 그런 그림. 나만이 알 수 있는 이기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때 마침, M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안다. 그도 내 이 허무함을 해결해줄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걸. 그래도 받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화를 이어가다가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지, 퍼부었다. 퍼부었다기보다 요목조목 설명했다. 돌아오는 반응은 역시나 내가 원하는 기준에 훨씬 못 미쳤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감정 표현에 약한 사람이다. 위로하는 것엔 더더욱 취약하다. 예전엔 그것이 감정 결핍증에 걸린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의 심각한 고민거리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안다. 그게 최선이고, 그만의 위로 방법이란 걸. 알고 이해하니까 이젠 그런 것이 나의 고민거리는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지구 상에 나를 완벽히 보듬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걸 깨우쳤다는 게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를 이해한다기보다 그런 나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이젠 괜찮은 것이다.

(사실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 큰 위로가 되기에, 이런 때에 나에게 크게 뭔가를 해줄 필요는 없다.)



한껏 퍼부었더니 좀 나아졌나. 그건 아니었다.

퍼붓는다고 뭔가가 해결될 거였으면 난 이미 '바가지'의 장인이 되어있을 거다.

나의 지금 이 갑작스러운 ‘망연자실’한 기분은 결국 내가 보듬고 나아가야 할 문제이다. 다행인 건 예전엔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원인 찾기에 급급했고, 토해내기 바빴고, 의지처를 찾아야만 해결이 될 것이라 착각했었는데 이제 나는 안다. 이건 그 누구의 탓도 내 탓도 아닌, 언제나 불쑥 찾아올 수 있는 일회성 감정이란 걸. 불쑥 찾아왔기 때문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홀연 사라져 버릴 그런 허상과도 같은 것이란 걸.

다시 울렁거림이 시작됐다. 무서웠다. 주변에 말하면 분명 호들갑 떨며 걱정할 게 뻔하고, 그렇다고 혼자 이렇게 이상한 상태를 지니고 있는다는 것이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뛸까? 아니다. 그러다 더 그르칠 것만 같다. 계속 걸을까? 기운이 없다. 맛있는 걸 먹을까? 생각나는 음식이 하나도 없다. (나에게 먹는 것은 최대 기쁨 중 하난데, 이것 조차 생각이 안 난다면 문제긴 문제다) 글을 써볼까? 사고 회로 정지다. 책을 읽을까? 생각만 해도 갑갑하다. 이런 기분으로 무얼 해낼 수 있을까. 뭐라도 있어야 할 거 같은데.

단순노동. 단순한 행동을 해보자.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할 수 있는 그런 것. 뭔가를 움직이면서도 지치지 않게 할 만한 것.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필사. 따라 적는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챕터를 고른다.

마침 떠오른 것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류시화)’이다. 만만하게 접근하기엔 이만한 책이 없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굵고 간결하게 펼쳐져 있기에 자주 손이 가는 도서이다.








최근에 <출애굽기> 40장 필사를 마친 적이 있었다. 무려 3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필사는 내 주특기(!) 중에 하나였다. 성경 읽기를 하면 내 원초적 게으름에 언제 멈출지 모를 일이었고, 마침 교회에서 필사본을 엮어 성경을 만든다기에 자신 있게 ‘출애굽기’를 쓰겠노라 선포(?)했다. 창세기는 목사님의 몫이었다. 그랬기에 자동반사적으로 그다음? 이란 질문에 내 몸이 반응하여 바로 손을 들고, 예배 중에 공적인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 기회에 진정으로 성경에 빠져보겠노라! 했던 내 각오는 출애굽기 20장을 넘어가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그래도 썼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고, 자연스레 쓸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잘 써지는 건 아니었다. 막바지에 가서는 따라 적는다는 것도 고통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팔이 저리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고 완성되기 바로 직전엔 내가 따라 적는 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무언가가 나를 쓰게끔 인도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완필했다. 굉장한 기분이었다. 출애굽기를 다 썼으니 남은 성경 65권도 해낼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창세기를 따라 쓰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이 필사 후에 한동안 나의 묵은 체증과도 같았던 ‘기도 제목’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가 누군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견뎌내서(?)인지, 그동안 그 주제를 놓고 기도해서인지, 시간이 해결해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 필사를 완성한 후에 내 마음이 180도 완벽하게 바뀌었다는 것. 놀라운 일이었다. 가장 마음 쓰는 이에게 고충을 토로해도, 나 스스로 작정하고 기도해도, 의지를 갖고 마음먹어도 안 되던 것이 마침 그 타이밍에 하나둘씩 녹아내려 되려 반대의 마음으로 그 현상을 대하게 됐다는 게…

이 이야기는 ‘이러이러해서 난 필사를 하고 해피엔딩의 삶을 살았습니다!’의 단순한 논리는 아니다.




출애굽기 40장 완성!




오늘의 내 지친 모양새를 이렇게 토로하듯이 펼쳐낼 줄은 몰랐지만(좀 더 솔직해지자면 알리고 싶지 않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포스팅을 펼쳐낼 계획이었다. 근데, 이런 내 심정으로는 어떤 진심도 담길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생각만 해도 싫었다.), 류시화 작가의 책의 일부분을 필사하면서 다시금 묘한 경험을 한다. 갑자기 내 손가락이 나의 마음을 표현하길 원하는 욕구의 도구로 움직여대고, 이렇게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다 보니 손바닥 크기의 정도만큼은 나아지고 있는 내 모습이 발견되었단 게 신기해서 이렇게 주절주절 표현하고 있다. 오늘 포스팅의 제목은 필사의 힘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내 못된 성격 중 하나가, (모두가 다 인정하고 잘한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가 날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어느 것도 날 구제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고립된 이로 자신을 몰고 간단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감정에 사로 잡히면 누군가에게 백 프로 솔직해지지도 못 하고(그렇지만 감정을 숨기고 포장하는 건 딱 질색이다.), 터놓는다 해도 완전한 치유가 어렵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결국 내가 스스로를 바닥이든 꼭대기든 몰고 가 맞닥뜨려 뭐라도 짚고 오게끔 하는 환경을 만든다. 그래도 종결이 될까, 말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이토록 이기적인 내가 된다. (혼자 힘으로 전부를 해결하겠다는 심보만큼 바보 같은 것이 어딨겠는가.)



부다페스트, 두너 강 야경




두어 시간 걷고 왔다. 강바람을 맞으니 몸도 마음도 한결 고요해진다.

두너 강 위, 국회의사당 맞은편, 어부의 요새 머리 위에 손톱만한 반원형의 달이 곱게 빛나고 있었다.

지그시 바라봤다. 노랗게 뿜어져 나오는 빛.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나의 의지가 아니어도' 내 마음에 잔잔한 호수가 자연스레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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