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에서 새하얀 빛이 났다.

코로나 시대에 돌아가신 할머니

by 케이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서머타임이 끝나는 날이었다.

할머니께서 내 꿈에 찾아오셨다.



난 평소에 꿈을 자주 꾼다. 순간 이동하는 내용이나, 절벽 같은 데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도 상처 하나 안 생기고 세상을 누비는 원더우먼이 되어 매번 등장한다.

엄마한테 이런 얘기 하면 "그래서 네 키가 큰가 보다.."라고 답을 한다.

그리고 남자 연예인 꿈을 심심치 않게 꾼다. 이재훈, 김우빈, 조승우, HOT도 있었고, 아! 박보검도 있다. 하나같이 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만 나온다. 꿈꾸면서 정이 들어서인지 더 좋아졌다.








지난 6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95세로... (누군가가 호상이라 말했는데, 옆에 있던 다른 한 분이 "호상이 어딨냐! 죽음에!"라고 소리를 쳤다)


그 당시엔 너무 정신이 없었다. 한창 코로나가 기승이었고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예상치 않고 있었다.


워낙 정정하셨던 분이다.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지시는 바람에 관절 수술을 하게 됐는데, 할머니 연세에 수술이란 것 자체가 무리였지 싶다. 코로나로 병원 상황도 뒤숭숭했고, 병실 예약조차 쉽지 않았었다. 의사는 쉽지 않은 수술이 될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무사히 수술을 받으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환자실로 옮겨지셨다. 온 가족이 촉각을 곤두세우던 때다. 누구도 병실 면회를 갈 수가 없는데 할머니는 점점 위독해지셨고,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는 언제든지 나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대기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일을 보냈다.


그런 상태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헝가리로 다시 돌아가고자 이것저것 채비를 갖추고 있던 나는 이런 상황에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막연하게 할머니의 상태가 호전되시길 바랄 뿐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우리는 모두 할머니와의 작별 인사를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환자실에서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며 누구 하나 찾아와 주기만을 기다리셨을 우리 할머니를 생각하면 울분이 터져 나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기다림 중에도 그 모습이 떠올라 자다가 소스라치는 기분에 눈을 뜬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코로나가 뭐라고! 할머니가 위독하신데, 이게 대체 뭐라고!" 엄마한테 씩씩거리며 이야길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특히나 우리 아빠(막둥이)를 매우 그리워하셨다.

한국에 있을 땐 할머니 애간장 태우기 바빴던 아픈 손가락이었던 아빠.

그땐 바쁘단 핑계로, 찾아뵙기에 면이 안 선다는 변명으로 할머니를 자주 못 뵈러 갔던 아빠라면, 인도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뵙고 싶어도 쉽게 손 뻗을 수 없었던 아빠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 한국에 있던 나는 할머니를 뵈러 엄마와 함께 안양 큰집으로 갔었다. 큰 아버지와 어머니는 출근 상태라 부재중이었고, 할머니와 요양사 아주머니 두 분이서 우릴 맞이해 주셨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도 자칫 옮길까 망설이다가 겨우 맘먹고 간 날이었다.


3남 4녀 중 막둥이 우리 아빠를 제일 예뻐하셨던 할머니. 자연스레 나와 내 동생, 막내 며느리인 우리 엄마도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바빴다. 특히나 내 동생은 그 귀하다던 장손이었다. 경상도 유교 사상 엄격하게 깃든 우리 대가족. 할머니, 할아버지께 내 동생은 세상 제일가는 보물이었다.


그날따라 할머니가 많이 힘들어 보이셨다. 늘 강인해 보이던 할머니였는데 그날만큼은 눈동자까지 흐릿해 보일 정도였다. 95세 가까이 되셨을 때도 너무나도 정정하셨기에 우리 모두는 "백 세는 거뜬히 넘기시겠다" 호호 거리며 대화를 나눴었는데..


할머니가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인절미와 쑥떡을 사 갔는데, 먹는 둥 마는 둥 하시고는 계속해서 베란다 창밖만 멀뚱히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그 모습이 어찌 된 연유인지 밤톨같이 작게만 느껴졌다.


"할아버지 얼굴이 기억이 안 나. 너무 보고 싶어"라고 말씀하시며 아이같이 우시던 우리 할머니. (두 분은 금실 좋기로 유명했다)


운 좋게도 엄마 휴대폰에 두 분의 젊었을 적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사진 정리하다가 “너희 할아버지 참 신사였지.. 얼마나 호남이셨게”하며 내게 사진을 보여주던 게 생각이 났다.


“할머니! 여기 할아버지 있어요. 얼굴 기억나시죠?”

"여보....." 하며 서럽게 우셨다. "이 사진 좀 다오...."

"할머니, 제가 집에 가서 인화해서 가져다 드릴게요. 이건 휴대폰에 담겨 있는 사진이에요!"

"뭬야?(보청기를 끼셨다)"

"지금 못 드려요. 종이 사진으로 만들어 가져올게요!"



"............. 그렇게 말하고선 안 올 거지? 아무도 나 보러 안 온다!"

말문이 막혔다. 정말 할머니 말씀대로 그렇게 말하고 안 올지도 모르는 나(혹은 우리)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허공에 날린 말들이 많았던가. 한동안 멍해지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할머니, 코로나(잘 모르시니 나쁜 병이라고만 말씀드렸다) 지나가면 한 달 안에 할아버지 사진 들고 다시 올게요. 아니, 금방 올게요!" 그때 난 비행기만 뜨면 곧 헝가리로 떠날 예정이었고, 사진을 준비해서 엄마 편에 보낼 작정이었다. 역시나 할머니보다 내 생활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할머닌 할아버지 얼굴도 떠올리지 못하신 채, 사진 한 장 못 지니고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 병실에서 기계 소리만 떠다니는 그곳에서 얼마나 삶이 무서우셨을까(의사 말로는 의식은 있으시다고 했다). 기억에도 희미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리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체념하고 계셨을까.


그때 당시 나는 끝도 없이 애처로워지는 마음을 애써 떨쳐내려 많이도 달렸다. 코로나를 탓해서 무엇하겠나. 어디에도 정답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7남매를 뒤로 한 채, 홀로 외로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선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마스크를 끼고 조문객들을 나흘간 맞이하니, 넋이 나갈 판이었다. 나와 남동생은 인도에서 발이 묶인 아빠 몫까지 두세 배로 뛰고 움직였다. 그래야만 했고, 그래야 할머니께도 아빠에게도 면목이 설 거 같았다. 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 할머니가 어제 꿈에 나오셨다.

꿈 내용이 지금도 생생해서 하루 종일 그 기억으로 무척이나 힘들었다. 한 시간을 걷고, 집에 와서 30분을 뛰었다.




(꿈속)

인도에서 막 귀국한 아빠와 막내 고모, 나.

이렇게 셋이서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할머니가 계신

중환자실로 향하고 있다.

꿈속에선 코로나가 없었다.

중환자실엔 이미 엄마와 큰어머니가

할머니를 지키고 있다.

중환자실 도착 -

아빠와 내가 손을 씻는다.

난 그 사이 할머니의 안색이 걱정되어 병실 문을 살짝 열어 침대를 바라본다.

엄마와 큰 어머니는 흐리게 보이고,

할머니만 클로즈업돼서 비치는데

살아생전 그렇게 온화한 사람의 얼굴은

처음 본 듯했다.

온화하신 정도가 아니었다.

꿈속에서도 기절초풍할 정도로

할머니 얼굴에서 광채가 뻗어 나왔고

그 속에서 난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평온한 표정이 나올 수 있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이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이다.'

할머니가 아파 보이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내 꿈은 끝이 났다.



할머니 얼굴에서 풍기던 뽀얀 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깨고 나서 생생하게 모든 장면이 생각나는 꿈은 아마도 이게 처음인 듯싶다. 그 할머니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벽을 멀뚱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행복'이란 것이 형체를 띤다면 그건 바로 우리 할머니였다. 세상 모든 행복을 우리 할머니가 다 끌어모아 가져 가셨다 느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꿈 내용을 설명하다가 할머니의 행복한 얼굴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 단순히 꿈 이야기만 하려던 건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엄마, 할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우릴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응? 그러니 꿈에 나오셔서 나랑 아빠를 보고는 그렇게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빛이 나셨지. 병실이 빛으로 가득 찼다니까!"

"좋은 꿈이네."

"아니, 그거 말고..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 장례식 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우리 할머니 생각하니 너무 외로우셨을 거 같아 맘이 따가워. 형용이 안 돼. 이 감정이.. 아빠도 그놈의 코로나가 뭐라고 인도에서 오지도 못하고 할머니 가시는 길도 못 지켰잖아. 그런 아빠가, 자식들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겠어...."



정신을 차리고 이모와 또 다른 통화를 나눴는데, 꿈 얘길 하니, "좋은 꿈이네,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시던 아빠, 너, 고모가 나왔잖아. 그 셋을 봐서 행복하셨나 보다."

그 얘길 듣는데 또 눈물이 났다. 그렇다. 할머니는 유독 우리 아빨 애지중지 여기셨다. 그리고 (할머니 기준에) 살갑고, 정다운 장손녀(나)도 매우 예뻐하셨었다. 막둥이 아빠는 무뚝뚝한 경상도 집안 고모들 &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사이에서 제일 재간둥이였다고 한다. 내가 봐도 아빤 끼가 많았다. 통기타 치는 것도 수준급이고,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거나 재롱을 피우는 건 다 아빠 몫이었다고 한다. 옛날 사진 속 아빠의 표정이나 포즈만 봐도 예사가 없다. 노래도 보통 잘 부르는 게 아니다. 예전부터 나는 아빤 사업가가 아니라 김창완 같은 가수가 되었어야 했다,라고 되뇌곤 했다.



"아빠는 어디 있냐.." 물으시면 인도에 있단 얘기를 수십 번은 더 했을 텐데, 우리 할머닌 인도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시던 분이었다. 그냥 엉엉 소리 내어 우리 아들 보고 싶다고 내 손 잡고 우시는 것 말곤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할머니를 엎고서라도 원하시는 건 뭐라도 해줄 수 있는 아빠는 더 이상 할머니를 볼 수가 없다.



이모랑 통화를 끊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건이 없으면 전화를 길게 안 이어가는 아빠. 더군다나 민망하거나 낯간지러운 얘길 하면 "됐어"하곤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 정도로 최민수 저리 가라 터프가이다. 각오하고 이야기를 꺼내본다.

"아빠... 할머니가 꿈에 나오셨어."

"왜? 돌아가신 분 꿈에 나오면 좋은 거야."

"그런 거야? 할머니가 너무 행복해하는 얼굴로 병실을 환희 밝히셨어. 그 얼굴은 내가 평생 가도 못 잊을 거 같아. 아마 보고 싶었던 아빠랑 내가 가니 할머니께서 기쁘셨나 봐. ‘이제 됐다... 나 가도 되겠다.’ 하는 그런 얼굴이셨어."

"내가 인도에서 못 가서 너희 할머니를 못 뵈었잖냐. 그게 꿈으로 나왔나 보네. 한국 가면 산소에 가서 인사드려야지..."



난 아빠가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애처롭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소식에서도,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은 후에도 ".... 아빠가 못 가니, 너희들이 고생해라!"하고 말을 더 이어 가지 않았던 그였다.

감정 표현에 서툰 아빠 때문에, 할머니가 편찮으신대도 못 오는 아빠의 심정 때문에 난, 홀로 아빠 마음까지 두 배로 아파야만 했다.



'계실 때 원 없이 잘해드려라...' 하는 이야기는 참된 진리이다.

물론 우리 할머닌 슬하에 7남매를 두시고 행복한 생을 누리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의 곧 본인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이라도 한 듯한 허망한 표정과 어제 꿈에 나왔던 가장 행복한 얼굴의 할머니의 모습이 교차됨에 당분간 이 두 모습이 내게 자주 찾아와 나를 힘겨운 영혼으로 밀어 넣을 것만 같다,라고 생각해본다.



'내가 햇님 반짝이는 날을 좋아하는 걸 알고 그토록 빛나는 모습으로 할머니가 찾아오셨었나' 싶기도 하다.




2020.06.19 [한 줌 재가 되어 천국으로 가신 할머니] 날이 참 맑았다.




* 이 글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가 가장 보고 싶어 하셨던 우리 아빠. 이 두 분께 바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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