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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Oct 27. 2020

커튼 사이로 비친 우리들의 이야기

부다페스트 이야기


친구가 나를 집으로 초대를 했다.

친한 동생이지만, 집으로 초대받기는 처음이다.



그 친구도 나도 그동안 바빴고, 지금은 둘 다 여유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시기적절한 만남이다.

커피만 마셔도 충분할 것을 밥도 해준다고 한다.



이 친구와 둘만의 시간도 오랜만이고, (이 녀석이) 손수 지어준 밥을 먹는 건 처음이라 기대가 됐다.

(지금부터 'S'라 칭하겠다)



지난주, 오랜만에 S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꿈에 내가 나왔다고 했다.

"언니가 꿈에 나왔어요. (중략....) 커피 한 잔 괜찮아요?"

"좋지!"



꿈 이야기도 궁금했고, S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도 궁금했다. S의 집 초대를 받기 전, 주일 예배 후 내가 먼저 S를 우리 집으로 불렀다.



"기왕 커피 마시는 거 우리 집으로 갈래? (교회에서 30초 거리)

"좋아요!"

어쩌다 보니 옆에 있던 D도 함께 동행했다. 그러다 보니 S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안 됐고, 적당히 커피 타임을 가진 후, 적당한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왠지 S의 이야기를 모두 놓친 기분이었다.

"집에 잘 들어갔어? 우리의 이야기가 미완성인 거 같다, 어째?"

"언니도 느꼈어요? 아까 제 이야기는 트레일러에 불과했어요. 시간 되면 내일모레 우리 집으로 올래요?"

"좋지! 갈게!"



집을 나서며..  "어서 나에게로 와"하고 손짓하는 하늘 길


내가 좋아하는 4,6번 트램. 강을 거쳐 부다로 향한다.


친구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푸드 트럭이 있었다. 배고팠는지 군침이 돌았다.


그 이름도 당당한 호텔 '부다페스트'





자주 지나치던 호텔 건물인데, 옆에 난 계단은 처음 봤다. 여기를 올라야 친구 집이 나온단다. 왠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길이다.

내가 모르던 길. 흥분된다. 내가 걸어보지 않은 길은 내게 새로운 시각을 허락한다.




부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함



그녀의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 입구부터 나를 사로잡는다.



빨강머리 앤이 앉아 책을 읽을 것만 같은 벤치



내가 그리던 S가 살 것 같은 집. 상상했던 것과 흡사 비슷한 풍경들이었다. 나 이상으로 헝가리를 애정 하는 친구.

'부다'지역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그녀. (나에게 '부다'의 이미지는 심지 있는 곳)



"와! 집 너무 좋은데? 햇살 가득 내어주는 창문, 창 밖 초록 풍경, 찰랑 거리는 바람 소리,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네!"

"언니, 그래서 이 집을 택했어요. 창이 있고, 볕이 그득하게 들어오는 곳을 원했거든요."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아. 포근하다. (할머니 품 같다고 생각했다)"

"주인 할머니가 마침 옆집에 살고 계세요. 집은 오래됐지만, 전 이 집이 맘에 들어요. 방, 거실, 주방도 따로 분리되어 있고.."

"그래. 왜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아."





S가 식탁을 준비하는 동안 홀로 하염없이 커튼 속 풍경에 빠져들었다.  거실을 환희 비추는 자연의 빛에 얼마간 매혹당하는 중이었다.

"S야! 여기서 책 보다가 스르르 잠드는 내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이런 데서 글 쓰면 뭐라도 나올 거 같고. 좋다, 좋아!"

"그렇죠? 안 그래도 저도 그런 시간들을 누리고 있어요."




(속마음)

'헝가리의 한 노부부가 이곳에 살았을 거 같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를 마주 했겠지. 주름과 미소가 훤히 비치는 햇살을 내리쬐며..'

알지도 못 하는 어느 아름다운 이들의 지나간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행복했겠죠. 당신들?'



그녀가 마련한 식탁



"와아! 이게 뭐야! 닭볶음탕, 생선구이, 오이 냉채? 하나 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정말요? 왠지 모르게 언니한테 차려준다 생각하니 아침부터 고민되고 긴장되고.... 이것저것 하긴 했는데, 정신없이 해서.."

"왜 긴장을 해. 나 아무 거나 다 잘 먹는데! 아침부터 고생했겠다. 생선을 너무 좋아하는데, 헝가리에선 자주 못 접하니까 새삼 반갑고 닭볶음탕은 내가 닭순이라 열흘에 한두 번은 기본으로 해 먹는 거라 역시나 좋고, 오이 냉채에 게맛살도 있네? 행복하다아!"

(음식은 완벽하게도 나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다음 날, 친구의 오이 냉채를 흉내 내 닭가슴살 냉채를 만들었는데, 가슴에 생채기가 날 뻔했다. 하하;)



식사 후,  하염없는 대화가 이루어진 곳




S와의 대화는 한낮의 꿈같이 몽환적이었다. (나른한 분위기도 한몫 했으려나?) 헝가리에서의 삶, 비자 이야기, 사랑, 글 이야기,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우정 이야기, 믿음, 태도와 의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건, 참하고 신중한 친구란 것.

진주알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소통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인상 깊었던 대화를 한 둘 남겨보려 한다.



1. 글 이야기

"언니, 왜 인스타에 글 안 올려요? 내가 얼마나 언니 글을 좋아했는데...."

"정말? 말을 하지. 난 네가 그렇게 느끼고 있단 것도 몰랐고, 그냥 끄적였던 마음들이니 뭐 혼자 적고 혼자 만족하고 그런 거였지. 웃긴 건, 인스타 해킹당했어. 그래서 그 이후로 흥미도 떨어지고.. 내 삶에 좀 더 집중하고파서 그냥 내버려 뒀어.”

"그랬구나.. 언니 글은 뭐랄까, 프랑스에 어떤 공간에 앉아 풀어서 쓸 법한 그런 글이에요." (이런 형용 굉장히 독특했음. 그러다가 몽마르뜨 언덕 흑인 오빠들 이야기까지 넘어간 그녀의 스펙트럼 ㅎㅎ)

"뭐라고? 허허. (그 글에 대한 형용이 완벽히 기억나진 않는다) 그런 글은 어떤 글이지? (민망함 솟아남) 네가 그렇게 애정 하는 줄 알았다면 그때의 내가 굉장히 행복했을 텐데.. 말을 안 하면 몰라. 기분은 좋네."

"인스타를 자주 봤어요. 언니의 글은 제가 알던 여느 글과는 달랐어요. 글로 위로도 많이 받고..."(내 입으로 설명해서 풀자니 꽤나 멋쩍다)

"아이고.. 근데 내가 이제 그쪽에서 발?을 뗐어."

-

글이 좋다가 아닌 구체적인 묘사나 감정 전달, 그것이 좋았다. 진심이 전해졌기에.




2.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

(이미 사전에 각자의 연애사를 논하고 있었다)

"너는 어떤 사람이 좋아?" (일명 이상형, 난 이상형 질문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이상형이란 그냥 이상형이지, 그것으로 사랑을 판단할 수 없다 생각하기에. 그냥 친구의 바라보는 시각이 궁금했던 거 같다)

"고통과 아픔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그 고난에 허우적거리며 나락에 빠진 사람이 아닌, 만연했던 위기를 잘 극복해서 정신 싸움에서 승리한 단단한 남자라면 좋겠어요. (정확한 묘사는 아니지만, 대략 이러했던 거 같다. ‘나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하며 난 나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속을 쿵-치는 답은 오랜만이다.

돈 많은 남자, 직장은 어디, 학벌은 이거, 집안은 이 정도, 성격은 어떤. 이런 쪽으로의 고루한 답변만 들어왔던 나로서는 꽤나 신선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이 친구, 본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친구구나.’



예전에 나랑 친했던 교회 남자애가 내게 그의 이상형 얘기를 했을 때가 기억난다.

"난 가난한 여자애가 좋아."

"왜?"

"그냥.. 부자는 싫어.” (긴 말 안 하는 스타일의 그)

내 어설픈 짐작으론, 그 친구는 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아오던 이었고, 아마도 힘들었던 삶을 이해해줄 여인은 '가난한 여자'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무튼 그때 그 친구의 답은 내게 꽤나 자주 떠오르는 말이 되었고, 내 마음에 고스란히 붙어 있는 장면 중 하나로 남아있다. 아니, 내가 들었던 이상형 중에 최고로 멋진 답이었다. (가난한, 이란 형용사가 신선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신과 신념이 좋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를 후려치는 듯한 말이 S와의 대화 속에서 등장했던 것이 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3. 관계에 대한 이야기

워낙 사적인 것들이 많으니 생략한다. 그렇지만 가장 길게 이야기했던 주제이다.


그 외 우리가 사랑하는 헝가리 이야기부터 사느라 바빴던 순간들, 놓쳤던 시간들에 대해 커튼에서 땅거미가 지기 직전까지 서로의 마음을 이어갔다.






나는 단어 사용을 '때와 감정'에 알맞게 사용하는 이들이게 호감을 느낀다. (글 말고) 순간을 잡아야 하는 대화적인 요소에서 말이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하나의 인간으로 봤을 때, 굉장히 매력적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때부터 그게

누구든 나의 눈빛은 반짝임으로 일관된다.

S가 딱 그러했다. 깊게 고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듯 보였고, 최선의 짝꿍을 찾듯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성을 다 했다.

평소 자기감정을 쉽게 표출하는 스타일이 아닌 그녀의 그 모습이 마치 저 옆에 있는 '커튼 속 햇살'같이 느껴졌다.

모르겠다.

동화 속 집 같다 여겨지던 장소 탓인지, 그녀와 나의 영혼의 교제 영향인지, 햇살 덕택인지, 혹은 내가 아름답다 느꼈던 S의 문장들이 나를 건드려서인지..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나는 그녀를 하나도 몰랐던 것처럼, 오늘의 이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노르스름한 노을빛 감정만을 허공에 둥둥 날리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S와 그날 내가 만났던 S가 조금 다르게 다가와서일까. 그녀를 좀 더 알아가고 싶어 졌다.



S의 집을 나서며..


땅거미가 내려앉는 순간의 BUDA(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화 같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서의 내 친구들이 그리운 맘이 들었다.

오랜만에 다 터놓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서인가보다.

나를 감추고, 예쁜 것만 드러내는 것이 아닌 마음이 향하는 것에 귀 기울이며 참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대화에 목이 말라있었나 보다.

S에게 고마웠고, 우리에게 주어졌던 그 시간이 감사했다. 그리고 S 같은 내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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