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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Oct 30. 2020

가장 가을 같은 날로 기억될 가을

부다페스트 일상


<10월의 어느 날>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린단다.

가을이 댕강 잘린 채 겨울 문턱 코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낮이 저녁 같다.

그러고 보니, 10.25일이 곧이다.

써머타임이 해제됨과 동시에 한국과 1시간의 시차가 더 벌어졌다.

한 여름밤 9시가 넘어도 환한 대낮 같았던 헝가리.

이제 곧 오후 3시만 넘어가도 어둑해지는 희한한 날들이 펼쳐진다.



조금은 단조로웠던 하루 일상에 대해 -

때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24시간의 하루가 신비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린 기이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상황에 둘러싸여 있다. 혹은 노출돼 있다.






< 낮 >


2020.10월. Inez bagel : 최애 베이글 맛집



2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갓 지은 베이글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는다.

비가 내리는 도시를 감상하는 이 고요한 순간이 감사하다.



Arany Janos utca



어러니 야노쉬 역 너머로 성 이슈트반 성당이 보인다.

‘조만간 저곳을 둘러봐야지..’ 하고 생각하며 걸음을 이어갔다.



길 위에 선 자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 도시 전체가 슬픈 열매를 머금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건 바라보는 내 마음이 서걱거려서인지도 모르겠다.


비를 닮은 거리



비를 뚫고 나갈 것이냐,

그냥 숨어 버릴 것이냐.




이제 곧 앙상한 가지만 남을 거리의 나무들 -





비 맞는 헝가리 국기 (‘정열, 충성, 희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산에 마스크에, 질척이는 바닥에.

내 몸에 의도치 않은 것들이 겹겹이 쌓이는 하루 -



내 작업실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린 요즘



이 카페의 직원과 친해졌다.

난 아무래도 헝가리어보다 영어가 편해 섞어 쓰는 편인데,

내가 헝가리어 공부를 한다고 말한 어느 날부턴가 노랑머리의 미소 천사 바리스타가 아무리 사소한 종류의 말이라도 내게 헝가리어로 이야길 하라고 눈짓을 보낸다.

나는 겸연쩍게 하하! 웃으며 그때부터 세상 순진한 아이가 된 것 마냥 낭랑한 목소리로 헝가리어를 외친다.

“Szeretnék kélni egy répa torta és egy flat white.”

(리뻐 또르따인데, 라빠 또르따로 발음했다. 당근은 늘 헷갈린다) 그럼 그 친구는 날 차분히 바라보며 다시 보고 이야기해보라 되묻는다.

“리뻐? 라빠?”

“리뻐!”

“옳지, 잘했어!”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칭찬의 미소를 건네받아야 나의 슬기로운 주문 시간은 끝을 맺는다 (굳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헝가리어 앞에선 난 평생 어린 공주 와도 같을 것이라 본다)



부다 지역


어두워지기 전에 페스트로 넘어가야지.






< 저녁 >




리스트 음대 거리에 있는 ‘cafe vian’

멋집 겸 맛집이다. 친구가 근처에 살았어서 한동안 자주 갔던 곳인데, 요즘은 소원해졌다.



Liszt Ferenc Zeneművészeti Egyetem


헝가리가 낳은 천재 피아니스트, 리스트 페렌츠 (음대)

한국 친구들도 이곳으로 음악 공부하러 많이 넘어온다.

친구 졸업 연주회 때 갔었는데, 세상에나.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보다 멋스러웠던 내부와 완벽한 음향시설에 입을 다물질 못 했었다.

(지난 주말 산책하다 지나치며 본 건데, 연주회가 있었나 보다. 모두 마스크 동여매고 열성을 다해 대기 중인 모습)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내 또래의 친구들이나 어느 선택받은 특정화된 무리가 아닌, 중노년층 신사, 숙녀분들이 관객 중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그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레 의상을 차려 입고, 우아하게 연주회를 즐기다는 사실이다.

이게 과연, 감동받을 만한 일인가(!)



멋쟁이 신사, 숙녀들. 입장!



Madách Színház (뮤지컬 극장)




난 이 극장을 보면서 해리포터와 친구들, 그리고 악당들이 이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 하고 가끔 상상한다.



부다페스트는 선진화된 공연문화를 경험하기에 좋은 (돈 번 기분이 들게 하는) 친절한 도시이다.

서유럽보다 저렴한 물가 수준에, 양질의 문화예술을 도처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헝가리인들 일상에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단 것 자체로 이들이 얼마나 삶과 예술을 사랑하는지.. 그에 대한 고찰을 종종 해본다.

아직 공사 중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부터, 리스트 페렌츠 음대 등 각종 전시, 공연장을 방문하면 ‘미드 나잇 in Paris’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멋스러운 예술공간을 마주한다.



뉴욕엔 브로드웨이, 런던에 피카딜리 서커스가 있다면

부다페스트엔 에르지벳(엘리자베스) 거리가!

(음악, 미술관, 박물관 등에 관련한 내용도 심도 있게 다뤄볼 예정이다. 올해 안에! 목표!)



‘아... 나는 이 도시를 거닐 때가 참말로 좋다.’



그림 같은 건물들도, 무심한 사람들도, 차분한 공기도,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나로 채워지는 것에 더없는 충만함을 느낀다.



뉴거티 역사에서 바라본 하늘




뉴거티 역 -

거리의 악사들, 집시 아저씨들의 집합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얻기 위해 매일 저녁 장을 보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 주로 거쳐 가다 보니, 역사 내부에 있는 Spar(규모가 커서 종류가 많다)를 자주 이용한다.






< 밤 >



비가 그친 후의 하늘은 역시나 반갑다. 때 묻은 것들이 모두 씻겨 내려간다.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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