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에 닻을 내리다
[첫 번째 이야기]
여행이 장기화가 되다 보면 몸이 지치고 동시에 마음도 시들해진다. 더 이상 새롭지가 않고, 숙제검사 맡듯이 여행을 다닌다.
설렘'이 없는 여행은 '잠시 멈추기'의 신호이다.
프라하에서 이모(인생 고민을 이모와 나누던 시기)와 통화를 마치고, 아래 글을 쓸 때가 바로 그런 마음이 들던 때다.
저는 지금 체코, 프라하에 있습니다.
홀로 여행을 시작한 지 어언 한 달째 : )
엄마, 이모와 파리, 런던 여정을 함께하고
홀로 영국, 켄트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가
2주간 성숙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새벽 5시에 기상하고 6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한 끼는 금식(어려운 이들을 돕고자), 다른 한 끼는 감사히 : )
매시간, 매 순간 기도와 찬송, 나눔의 시간을 가졌고. 내일의 걱정이 아닌 지금의 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모두 함께 그렇게...
한국에서 일어난 사고(세월호)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유럽 일주의 원천이 되었던 체코 친구들(미국에서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을 만나,
한 친구 집에 머물며 남은 여정들을 계획하고 있는 중입니다. 토요일에 슬로바키아로 넘어가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날 겁니다. 그 친구들과 옆 나라 오스트리아도 가보고 그다음 주 수요일에 헝가리로 가 또다시 홀로 여행을 할 예정입니다.
(헝가리는 무리가 되는 일정이긴 하지만 더블린으로 돌아갈 집이 20일부터 가능하기에! 방금 급하게 부다페스트행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지금 보니 이때가 운명의 시작점이었다.)
장기간 움직이고, 떠돌다 보니 조금 지쳐가고 있습니다.
막연한 계획들만 가지고 나섰던 여행길.
변수도 많고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로 갈 때마다 고독이 덩어리째 몰려오기도 하고..
짐 풀고 싸기, 빨래, 교통문제와 숙박 정하기 등등. 예상치 못한 비용 초과(이건 정말 여행 때마다 살 떨리는 순간ㅜ 잔고 걱정 없이 다니자고 수백 번 다짐하지만 눈에 보이는 내 잔고ㅋㅋ 소소한 걱정일 뿐이라고 매번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그 외에도 무수히 주어지는 내 삶의 선물들(좋은 것이든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이든 나는 이것을 선물이라 부르고 싶다)
내가 존재하기에 받을 수 있는 것들. 안전한 여행길 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2014년 5월 8일, 비 내리는 구시가지, 한 카페에서..)
유럽 여행의 시초는 '아일랜드'였다.
아일랜드, 더블린 워홀러로서 버거운 그곳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남들 구하기 어렵다는 JOB도 있었고, 더 구하기 어렵다는 쉐어하우스도 있었고, 따뜻한 친구들도 나와 함께였다.
단 하나, '내 마음이' 그곳에 '없었다'.
제일 중요한, 나를 움직이는 '마음'이 없었다.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아마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내 마음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 도시를 품는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이상했다. 그 감각이 나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세밀하고, 강렬하게 내 몸이 반응했고, 더블린에 있는 동안 그 반복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눈 뜨기가 싫었고, 밤에는 내일 눈을 뜨면 더블린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큰소리 떵떵치고 온 ‘더블린에서의 1년'을 온전히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그릇되었음을 그땐 몰랐다.
가보지도 않은 '더블린'을 '내가 세운 계획대로' 자로 잰 듯 지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난 6개월의 어둠 같았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후 진행된 ‘유럽 일주'라는 타이틀은 한국행을 '유예'하기 위한 명목이었다.
더블린은 떠나고 싶었지만, 한국에는 가기 싫었다.
아일랜드에는 정 붙이기 어려웠지만, 이곳이 아닌 그 어느 유럽이면 우선, 만사 오케이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더블린을 떠났다.
'유예'를 위한 여행이 그저 설레었을리만은 없다.
'엄마와 이모'와 함께 했던 '파리와 런던' 여행을 시작으로, 영국 켄트에서 보냈던 '공동체 생활', 그리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빈... 그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채워지면서 나를 압박해왔다.
이 여행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잘못된 게 아니라, 이런 마음으로 돌아가는 '내'가 잘못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했던 여행이었지만, 결국 답은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내 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쉬웠지만, '이곳으로 다시 나오기는 어렵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아일랜드로 오기 전, 수백만 톤의 무게처럼 내 마음에 얹힌 퇴사 고민, '내 삶을 살고 싶다'라는 소망이 나날이 교차되면서 치밀하게(?) 계획해온 '유럽에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하필 '더블린'이었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Dublin....
2013년, 11월. 나의 첫 더블린은 차가웠다. 그 첫인상은 바뀌질 않았다. 바뀌긴 했다. 더 안 좋은 쪽으로.
이상하리만큼 그곳과 맞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던 거 같다.
원래는 영국행을 위한 준비가, 결국 아일랜드행이 되었고, 그냥 '옆 나라'로 가는 것뿐인데, 뭐가 대수인가 싶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 하나 달랑 들고, 도대체가 무슨 용기였는지 '나흘간 한인민박 예약'만 해두고선 그곳에 도착했다. 더블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부터 내 컨디션도 최악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부터가 더 가관이었다.
알고 보니 써머타임이 해제된 최악의 날씨를 자랑하는 더블린의 11월이었던 것이다.
축축한 추위, 음산한 분위기, 바가지 씌운 공항 픽업 차량, 민박집 예약 누락, 그때부터 인지한 '런던보다 비싼 물가', 회색빛 도시가 만든 무표정한 사람들, 낯선 발음의 아일랜드식 영어, 뭐 하나 좋은 인상이 없었다.
모두가 '환상의 나라 아일랜드(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졌던 것)'로 떠난다고 부러워했지만, 현실은 '엉망'이었다.
특히나 내 몸 하나 제대로 뉘일 곳, 집을 구한다는 것이 두 달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는 것. 타지에서 집 없는 서러움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 거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고생 고생 이런 서러운 고생이 있을까 싶었다.
더욱이 서러웠던 건 이 모든 것이 내가 자처한 '모험'이었기에, '궁상'이 아닌 모험에 걸맞은 '늠름한, 멋진'태도로 일관되어야 했단 것이다.
친구나 가족에게도 말 못 할 '설움'이었다. 돌아올 답변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게 누가 힘들게 가래? 그렇게 힘들면 돌아와!" 듣고 싶은 답이 아니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집 나와서 개고생 중인데,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까지 사서 들고 있으니 이쯤 되면 '반미치광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 '더블린'은 돈 주고도 거주할 집 하나 쉽게 구할 수 없던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악명 높은' 도시였다.
최종적으로 계약한 집에 들어가기 전, '그 집에 적합한 인물인가' 면접까지 봤었다면 말 다 했지! 결과는 나중에 '통보'해주겠다고 한 브라질 친구와는 결국 막역한 사이가 되었지만, 그때 당시 쫄깃했던 심정은 참담하다 못해 인생 다 산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우리 집에 들어와도 된다!'라고 문자를 받고, 호스텔 같은 친구들이랑 얼싸안고 울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웃프다. (여기서의 웃음은 썩은 웃음)
알고 보니,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든 곳'이라고..
교통비 아낀다고 이민자 가방을 들고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낑낑거리며 움직인 적도 부지기수. 교통권 편도 한 장 가격이 3.5유로(2013년 말 기준)나 했었다. 하도 이곳저곳 짓궂은 겨울 날씨에 비 맞으며 옮겨 다녀서 나중에 집을 구했을 땐, 가방의 바닥이 다 벗겨져 있었고, 집을 구하고도 홈리스가 된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Dear my friends, (친구들아, 보렴!)
모두 안녕하시죠?
요즘 더블린은 매우 거친 바람과 함께 비가 가로로 내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드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영하의 날씨는 아니지만 습한 추위라 아마 한국보다 더 추울 듯합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두 달이 다 되어가네요. 온갖 여유를 부리며 지낼 줄 알았지만 그동안 매우 정신이 없었습니다.
특히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싶을 정도로 특별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 쓰는 정도로만
그쳐야 했을 정도로 피곤하고 바쁜 날들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보다 일을 먼저 구했고 지난주에 정식으로 이사 갈 집에 Deposit을 내고 왔습니다. 12월 28일! 이사 갑니다. (이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렇게나 기쁘다니!) 이제 정말 크나큰 이민자 가방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어깨에 꾹꾹 눌러 담은 백팩도 가볍게 만들 수 있고, 작은 두 캐리어를 양손 가득 안타까워 보일 정도로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지난날들의 아일랜드 생활은 이사, 이사, 집 걱정, 집 걱정이었습니다.
11월 7일: 더블린 도착 - 한인민박에서 하루 묵음(예약 취소 사건 발생)
11월 8 - 11일: 민박 주인 아주머니 지인 가정에 묵게 됨
11월 11 - 15일 : Paddy's House B&B - 한국에서 온 선희언니와 함께!
11월 15 - 17일 : Marilyn Mansion : 본의 아니게 방을 못 구해 비싼 싱글룸에서 사치
11월 17 - 19일 : Abigail Hostel : 시티에 근접한 호스텔 (4인실 사용)
11월 19일 밤 : 더블린 국제공항에서 노숙
11월 20 - 30일 : 스페인 (Madrid, Tudela, Zaragoza, Barcelona)
바르셀로나에서 핸드폰 도난당한 후, 얼마간 패닉 상태
11월 30일 - 12월 3일 : 프랑스 (Paris)
12월 3 - 15일 : 단기쉐어 with Yun(호스텔에서 만난 동반자, 앞으로 함께 살게 될 내 친구)
12월 7일 : 1월 1일부터 들어갈 방 구함 + 안 믿겨서 반나절을 소리 지르면서 보냄
12월 8일 : 대만 친구 소개로 카페 면접 시도!
12월 9일 : 바로 인터뷰 봄 - and 합격 & 집 계약 무산 (이때부터는 정말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무 지치기도 했다)
12월 11 - 14일 : 면접 후 바로 일에 투입 (트레이닝 기간 - 인터뷰에서 오케이 받았다고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순간)
12월 15일 (~28일) : 비바람 헤치고 또 다른 단기 방으로 이사 옴 - 옆방에는 브라질 커플, 지금 내 방에는 3개의 침대가 있고 옆 침대와 아래칸 침대에 브라질 여자애들이 자고 있다.
여느 브라질 애들과는 달리 차분하고 정적인 친구들이다.
(이사 전까지 지낼 방이 필요하다)
이곳에 와서 벌어졌던 일들. 어느 것 하나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 없었다.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기본적인 방향이 잡혔고, 한 달 하고도 20일이 지나야 보금자리라 불릴 수 있는 집에 들어간다.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에 쓰는 편지)
그냥 나에게 더블린은 '춥고, 고단함'으로 각인되는 곳이다. 물론 따뜻한 순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온몸을 휘감은 채 켜켜이 쌓인 그 '차가움'을 견디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이 도시를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하루에도 몇 개씩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