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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Oct 21. 2020

나는 몰랐다. 이곳이 나의 도시가 될 것이란 것을,-2

부다페스트에 닻을 내리다




곧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한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인 그곳에서 놀라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유럽 일주의 종착지가 될 헝가리 도착 전, 위와 같이 일기에 기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




‘부다페스트’가 나의 도시가 될 것이란 것



DUNA RIVER (두너 강)


페스트에서 바라본 광경


부다페스트 대표 관광지 : 세체니 다리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본 '페스트'



그렇게 부다페스트에서 일주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난 예정대로 더블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 직감은 현실이 되었다.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단순히 '살고 싶다', '멋지다', '정말 좋다'라는 감정을 느낀 적이 종종 있었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렇듯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헝가리는 '살고 싶다'가 아닌, '살아야겠다', '방법이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라도'라는 생각과 의지가 마구 불타올랐던 곳이다.



그 마음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

(이때부터 무슨 힘으로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무작정 가야겠다, 란 생각이 들었고, 수중에 남은 돈도 얼마 없었지만, 청소 일이라도 할 각오로 갔다)

단 몇 개월이라도 살면서 이 나라와 도시를 생생하게 만져보고 싶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 마음과 결단을 전달할 길이 글 말고는 없었다.

   


아래 장문의 글은 그 당시 내가 느꼈던 마음을 최대한 솔직하게 적어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전달한 내용이다.

(일 관둔 것도 모자라 여행하다 사랑에 빠진 국가로 넘어가겠다고 말하는 내게 "너 미쳤어?"라고 뜯어말리는 친구를 향한 최후의 통첩(?)이기도 했다.)




머르깃 다리 위 노란 트램




아래 내용은 더블린 생활과 유럽 일주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찰나에 한국행 티켓을 버리고, 다시 부다페스트행 표를 끊고 난 후, SNS에 뿌릴 요량으로 작성한 편지글이다.








저는 모험가도 아니고, 비현실을 쫒는 이상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런 제가 부다페스트를 만났고, 큰 결심을 하나 했습니다.



보름 후에 더블린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그곳으로 향하려 합니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려 마음을 다스리며 정리하는데 꽤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겨울 지인도, 일도, 살 집도 무엇 하나 준비되어 있지 않은 더블린에 오면서 ‘그래도 해볼 만한’ 일이라며 용기와 포부를 지니고 왔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더 춥고 고단하고 견디기에 벅찼던 기억이 새삼 납니다.
그래도 최소한 영어권 국가이기에 한국어 다음으로 구사할 수 있는 언어 하나만 믿고 ‘맨땅에 헤딩하기’를 했고, 반년이 지난 지금, 많은 과정의 겪고 난 후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접어들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4월 12일부터 40일간 6개국을 누비며 여행을 하였고,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가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계획보다 조금 더 일찍 한국에 돌아갈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까지 하며 마음에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계속하여 기도 했습니다. 길을 보여 달라고…)


사실 한국을 떠나기 전, 기회가 된다면 외국에서 살 기틀을 마련해보고 싶다, 라는 막연한 소망도 가졌었고, 겨울의 더블린이 너무 고됐기 때문에 계획했던 기간만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외국에서 산다면 그건 내가 경험해봤던 ‘호주나 미국이 될 것’이다…라고 틈틈이 곱씹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사대주의자 같아 보이네요.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아시리란 걸 믿고^^
한국이 우리나란데 물으나마나 좋은 건 당연하죠! :)
한국에 있는 가족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 음식, 집,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편히 누렸을 생활들…
너무 그립고, 향수에 젖어 반나절을 넋 놓고 지내 보기도, 밤마다 외롭고 차가운 이 공기에 몸서리치며 ‘왜 이곳에, 무얼 위해? 두렵다…’라는 마음의 지배도 받으며 나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처음 2-3개월 동안은 늦잠꾸러기인 제가 새벽 3시, 5시, 6시… 하루에도 서너 번 화들짝 놀라 일어나기 일쑤였습니다. (이 정도면 심히 힘들었었단 증거)
무작정, 외국에 나와 살고 싶다! 이런 류의 목표는 아니고, ‘그저 세계를 보며 세상을 배우며 그렇게 다니다 마음이 이끌리는 곳이 있다면 자리 잡고 싶다’ 정도의 바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다국적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도 흥미로워하고! 넓은 시야를 지니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또한 즐겨하기에!


여행을 하며 느꼈던 거지만, 어느 도시 하나 빠질 것 없이 저에겐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파리에선 하늘이랑 공원이 좋았고, 런던은 댄디한 영국 신사들 덕에 눈이 호강하고, 영국식 발음이 멋져 귀가 즐거웠고, 공동체에선 소중한 이들과 함께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고, 프라하는 부다페스트 다음으로 제일 좋았던 곳이었고(여기서도 살고 싶다..라고 연신 외쳤던 듯!) 브라티슬라바에서는 친구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뜻깊었고, 비엔나는 친구와 함께라 행복했고..
 


각 나라의 하늘이 그저 감격이었던 저의 걸음, 걸음을 발자국 여행이라 이름 짓고 싶습니다.






그래, 부다페스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반말 모드 돌입)
공동체에서 나와 프라하에 있을 당시, 다시 돌아갈 더블린에 집도 일도 없는 또다시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남은 여행이고 뭐고. 다 접고 한국에 돌아갈까, 까지 고민을 했다.
But! 힘들게 더블린까지 온 내 결정에, 삶의 방향을 온전히 설정해 보고자 목표한 내게! 칼만 뽑고 무 꼭지만 다듬은 듯한 이 기분으로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 다시 살 집을 우선 알아보자! 하며 아유모(아일랜드 유학생 모임)에서 정보를 구하고 혹시 몰라 전에 룸메이트에게도 문자를 보냈었는데, 마침 본인 룸메이트가 3주간 유럽여행을 떠난다고
20일부터 지낼 수 있다, 라는 답변이 왔다. 그래, 이거야!
내가 믿고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집 위치가 어떠하든, 깔끔하지 따뜻한지 등은 따지지도 않고 그 집에 들어가겠노라, 했다.
그러면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 후에 일주일 정도가 공중에 뜨는데, 어찌할까?라고 1초간 고민한 후, 원래 계획대로 가고자 했던 (그렇지만 가지 않으려고도 했었던) 헝, 루, 불 중에 헝가리에 남은 시간을 보내자, 라는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글에 남긴대로 어메이징한 감정이 그곳에 있는 내내 내 심장을 두드렸고,
그 마음 하나 믿고 난 다시금 부다페스트행 티켓을 끊었다.(현실은, 덜덜덜 - 떨면서)


사실 이건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다.
대학교 1학년 때, 2학기 등록금으로 종잣돈 삼아 호주로 향했던 일, 부족했던 영어로 미국 캠프 스텝으로 뛰었던 일, 현지인들만 몸 담고 있는 시드니 NGO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일, 늦었다 보일 수 있는 나이에 안정적으로 하던 일을 접어두고 아무 연고도 없는 더블린으로 왔던 일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어마 무시한 일, 일 수 있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했던 일들 역시 그때 당시엔 말도 안 되고 버거웠던 무시무시한 도전들이었다.
다 이겨내고 견뎌내고 이뤄냈다.(슈퍼맨처럼은 아니고 힘든 일은 버겁게 누릴 수 있는 것들엔 평범하게!)
내 삶에 큰 성취감과 행복으로 자리 잡는 그 순간들.



갖춰진 길을 따르는… 남들이 보기에 안정적으로 보였던 내 생활이 나에겐 여느 때 보다 불안정했던 순간들로 다가온 적이 많았고, 그대로 가면 올바른 수순을 밟을 수 있었던 과정들이 나에겐 그저 자갈밭 같았던 미로처럼 여겨지던 때도 부지기수였다.



지난 여행 기간 내내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고, ‘존재’하고 있음이 매 순간 체감돼 그 속에서 오는 행복함에 감사, 또 감사의 기도를 드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여행 중간중간 겁도 나고, 외롭기도 했지만 말이다.)



부다페스트행 비행기 티켓만 손에 쥔 채, 그곳에서 살 집, 생활을 영위해 나갈 직업 등 너무나도 막연해서 더블린에 처음 왔을 때처럼 이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인다.
심지어 영어권 국가도 아니라는 사실이 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럼에도 내가 가고자 감행한다는 건 정말 가야만,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



 “일주일 만에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어? 너무 섣부른 거 아니야? 뭐가 좋았는데?”



좀 더 쉽게 이해시키고자 만든 답 :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라고 결혼을 결심한 이에게 왜?라는 질문. 퍽, 경솔해 보인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인 결혼에 대해 당사자가 그러한 말을 뱉기까지는 기간이랑은 상관없이 신중함, 확신, 믿음 등에 수많은 질문을 던져보고 한 결정일 것이기 때문에.
혹은 질문을 던져볼 필요도 없이 강한 끌림이 있었던 것일 테니. (결혼이랑 비교하니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서도!)






따라야 할 길이 있다면 기꺼이 따르겠지만 우선 지금은 제가 밟아 나가는 제 길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헝가리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을 이제 막 가져보는 중입니다.
한국이든 헝가리이든 제3 국이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늘 고민하고 선택하고 싸우며 나의 삶을 온전히 누리려는 자세, 그것을 키워나가보고 싶습니다. 그 배경이 그저 이곳이 됐을 뿐이라고 말씀드리면 너무 거창한가요?



세상에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은 분명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지금 이 결정이 설사 이루지 못할 꿈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해보자, 가보자’가 최선이라 여겨집니다. (사실 기도하던 중 이러한 상황을 마주했기 때문에 이 마음조차도 허락해 주셨다고... 그분이 함께해 주시리라, 믿고 또 믿고.)
 


여기서 아무리 재어보고, 그려본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잡히는 실체가 아닌데.
그 실체에 맞닥뜨려야 잘한 결정인지 잘 못한 결정인지 알 테고(나에게 잘 못한 결정이란 없다. 이것에서도 분명 배우는 것은 있으니까) 최소한 마음먹은 것을 위해 뛰어보기라도 해 봐야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기에.  



*혹여라도 계획보다 더 일찍 한국에 가게 되면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 한 마디 해주시면 그저 감사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한 끝에 기회를 잡아 뿌리내린다면,
부다페스트 숙박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제가 아는 모든 분들! 책임지겠습니다!  



그저 무모해 보이지만 제 딴에는 짧은 기간 동안 기도하고 기도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결정을 내린 것이기에. 걱정과 우려보다는 응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날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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