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이야. 억지로 붙들어봤자 너만 힘들어.”
주리 언니가 말했다. 안 좋게 끝난 인연을 씁쓸해하는 나에게 건넨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참 좋아했던 친구가 있다. 함께 밥을 먹으러 가서 각자 휴대폰을 보며 침묵을 지켜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이없는 일을 당해 어서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식을 전해야지 하고 쫓아가면, 눈빛만 보고도 대충 짐작을 했다. 우리의 대화는 대체로 시시껄렁한 농담이 가득했지만 가끔 서로의 대나무 숲이기도 했다. 그 친구와는 단 번에 멀어졌다. 구체적으로 떠올리자면 마음이 쓰려, 간략하게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나의 비밀을 전한 일 때문이었다. 친구는 여상하게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 내겐 배신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때려 줄 거야!’ 하는 미움은 없다. 다만, 참 좋은 사이였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그렇게 안녕할 수밖에 없었던 인연이, 시절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정도 많고 미련도 많고. 그러나 미련을 훌훌 털어내는 내적 성숙을 이루진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만남만 그런 것도 아니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직 3년밖에 공부하지 않은 햇병아리 지망생이지만, 그래도 꿈은 크다. 내가 쓴 대본이 드라마가 되어 누군가 보고 슬며시 웃고, 가끔은 울컥하는 장면을 수 백 번 그려봤다. 작가의 일은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내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라고 했던가. 나의 꽃은 언제 핀다는 기약도 없이 덤덤히 흙 속에만 자리한다. 여전히 씨앗 상태일 거다. 흰 종이를 까맣게 물들이며 조심스레 노크를 해봐도 묵묵부답. 불합격자에겐 탈락 문자조차 주어지지 않는 치열한 공모전의 세계도 여전히 묵묵부답. 무응답의 세상에 나는 살고 있다.
이런 내게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얼마나 달콤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때가 되면 인연이 합해진다는 의미의 불교 용어, 시절인연. 사람과의 만남도, 일과의 만남도, 모든 만남은 다 제 인연의 때가 있는 법이다.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 없다. 아직 시절인연이 깃들지 않은 것일 뿐, 이루어지지 않은 게 아니니까. 사람도 꿈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단어였다. 억지로 붙든다고 해서 붙들어지는 것은 없다. 그건 나의 일이 아니라, 그것의 일이니까.
‘애쓰지 말아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염세적인 해석도 있을 것 같은데, 용어의 의미에 조금 더 다가가면 그렇지 않다. 인연이 성숙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면, 만남을 이룰 때 더 성숙한 모습이 되도록 가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 순간, 내 앞에 주어진 눈부신 지금을 가꾸고 소중히 피워내는 것뿐이니까.
씁쓸한 인연의 끝과 무수한 탈락에도 불구하고 내게 남겨진 것이 많다. 손을 꼭 잡고 남은 날을 함께 살아가자 약속한 J와 아침이면 가슴 위로 폴짝 올라와 쓰다듬어 달라며 근엄하게 자리 잡고 앉는 고양이 영춘. 면역력이 떨어져 걱정이라는 내게 면역력에 좋은 영양제를 알려주는 Y. 외로운 시기의 근황을 물으며 안부를 전하는 지인들. 글을 포기하지 못하게 마음에 불을 지피는 아름답고 찬란한 작품들. 웃기고, 울리고, 서글프고, 행복하게 만드는 많은 책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모든 인연을 놓지 않을 경제력을 뒷받침해주는 회사가 있다. 이 순간을 가꿔야 한다는 말은 직장과 관련해서 유난한 울림을 주었다.
작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치솟아 오른다. 내가 쓴 글이 부끄러울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자취를 감춰버리지만, 어찌 됐든 치솟는 열정에 ‘퇴사하고 전업으로 글을 써봐?’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작가 카페의 꾸준 글이 떠오른다. ‘절대 퇴사하지 마세요. 작가들 열에 여덟 아홉은 돈 못 법니다. 투잡이 기본이에요.’ 부족한 글로 돈을 못 벌어 대출 이자도 못 내고 고양이 간식도 못 사는 처지가 될 것이 두려워 사직서는 조용히 마음에만 묻어 뒀다. 그래서 직장은 내게 먹고살기 위해 붙들고 있던 존재였다.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한 존재.
하루의 삼분의 일을 직장에서 보낸다. 지금은 재택근무라 물리적인 공간은 집이지만, 그래도 근무 시간은 여전하다. 화장품 회사 마케터에서 IT 회사 서비스 기획자로 이직한 지 꼬박 1년이 지났다. 쉴 새 없이 트렌드를 쫓아가고 일분일초 바뀌는 의사결정에 피가 마르지만, 프로젝트 오픈 시마다 성취감이 어마어마했던 전 직장을 떠나온 이유는 ‘기술과 밀접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노동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재미는 있을지언정 접근 방식은 과거로 회귀하고, 리더십은 산으로 가는 전 회사의 행보에 지쳤고, 나의 커리어에 좀 더 의미 있는 곳으로 터를 옮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찾은 새로운 직장에서 나는 일 년 만에 철저히 직장과 삶을 분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시절인연의 울림으로 느낀 것은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작가라는 꿈과 밀접하게 닿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귀하게 대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책을 한 자 더 읽지, 글을 한 줄 더 쓰지 싶은 생각을 자주 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입사 초기엔 전혀 다른 업계로의 이직이 주는 부담감에 나머지 근무를 자처해서 하며 업계 용어를 익히고 프로세스를 이해했다. 차즘 익숙해지자 이곳은 전 회사와 달리 업무 강도가 낮은 편이고, 변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꽉 들어찬 시간에 갑자기 구멍이 뚫린 헛헛함은 작지 않았다. 꿈과 직장의 괴리와 헛헛함이 맞물려 나는 노동 시간을 아무렇게나 보냈다. 맡은 일만 문제없이, 더 하려는 노력은 없이.
시절인연이기에 또한, 모든 만남은 소중하다. 이유 없이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닿아 합해진 인연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아무렇게 보내는 시간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건 내 진심이 아니다. 노동에서 단 한순간도 소외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의 진심이다. 나의 노동 시간을 유의미하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봤다. 기획자로써 갖춰야 할 역량, 도움이 되는 툴Tools과 관련된 사내외 강의를 수강하며 꿈뿐만 아니라 현실의 만남도 귀하게 대접하려 노력 중이다. 단단한 현실이 있어 그 위에 서 깨금발로라도 꿈을 좇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도 종종 아쉬운 인연을 씁쓸해하고 이뤄지지 않는 꿈에 좌절하고 현실과 꿈의 간극을 좁히지 못해 무력해질지 모른다. 그래도, 잠깐 방황하다가 다시 제 자리를 찾을 거다. 깨닫기까지는 어렵지만 일단 깨닫고 나면 잘 잊지 않는 게 나의 장점이니까. 사람과 일,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과거의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때일지도 모른다. 지금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귀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다가오길 기다리는 시절인연을 맞이하는 최선의 방법일 거라 믿으며, 나는 현실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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