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제 때 챙겨 먹어야 하는데 말이지
올 설에는 떡국을 못 먹었다. 우리 가족은 다들 떡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에는 먹을게 정말이지 넘쳐나기 때문에 굳이 떡국을 먹을 필요는 없어서일까. 그래서 엄마는 떡국도 아주 조금만 만들었다고 했다. 없으면 아쉬울 테니, 가족 구성원들이 딱 한 그릇씩만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아마 내 몫의 한 그릇도 냄비 안에 남겨져 있었을 거다. 당시에는 고사리와 도라지 무침을 곁들인 고소하고 맛난 비빔밥에 푹 삶은 고기 살이 부드럽게 벗겨지는 짭조름한 갈비찜에, 먹을 게 넘쳐서 떡국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설날 아침 제사를 지내고 거하게 한 상을 먹은 뒤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바로 공항으로 갔다. 소화가 채 되기도 전에 흔들리는 비행기를 한 시간 탔더니 결국 체했다.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한참을 게워냈다. 그러고 나서 배가 꺼지니 떠오르는 건, 미처 먹지 못한 떡국 한 그릇이었다.
어릴 적에는 지금보다 더 떡국을 먹기 싫어했다. 그런 내게 아빠는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지, 안 먹으면 나이 못 먹는다”라고 했다. 그땐 한 살 더 먹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심심한 국물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 꾸역꾸역 먹었더랬다. 지금 같으면 땡큐! 하면서 안 먹을 텐데. 어릴 적이나 나이 들어서나 여전히 떡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설이 충분히 지난 지금까지 남기고 온 떡국 한 그릇이 생각나는 건, 못내 아쉬워서 그런가 보다. 추석엔 송편, 동지엔 팥죽, 정월대보름엔 호두, 여름엔 냉면, 겨울엔 방어, 봄에는 달래장, 가을엔 전어, 그리고 설날엔 떡국. 음식이야 원할 때 즐기면 된다지만, 그래도 딱 좋은 순간이 있지 않나. 떡국을 먹기에 딱 좋을, 그 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시절마다 좋다는 거, 남들 하는 거 같이 즐기자고, 그런 것에 행복을 느끼며 살자고 결심한 순간이 있다. 몇 해 전 여름, 친구들과 양평에서 일하는 S를 만나러 갔었다. 각자 사회로 나와 일을 하면서 만날 시간을 맞추기가 점점 더 어려웠다. 그런 와 중에 모처럼 시간이 맞아 S의 집에서 1박을 하는 일정이었다. 친구의 차를 타고 서울에서 양평까지 달렸다. 짧은 거리지만 그 와중에도 고속도로에 잠깐 들러 깨알같이 군것질을 했다. 양평에 들어서자 온통 녹색 물결이었다. ‘시리게 푸르다’는 말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 익지 않은 한여름의 벼가 빼곡하게 논에 심겨있었다. 바람이 불면 한 방향으로 차르르 누웠다가 일어섰다. 차창을 열면 풀과 흙과 여름의 습기가 훅 끼쳐왔다.
S가 미리 찾아 놓은 백숙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계곡을 접하고 있는 식당은 뭉툭한 자갈이 갈린 넓은 마당에 몇 개의 평상을 놓고 있었다. 무슨 무슨 ‘가든’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곳이었다. 걸음마다 잘그락 거리는 자갈 소리를 들으며 훌쩍 큰 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에 위치한 평상에 자리 잡았다. 매콤하게 버무린 도토리묵무침과 파전, 푹 끓인 닭백숙을 싹싹 비웠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취한 것처럼 흥얼거렸다. 수 십 번은 반복한 과거 이야기로 한바탕 웃고 떠들었었다. 한 여름에. 친구들과. 여름 풍경이 있는 곳에서. 여름 음식을 먹는 것. 원할 때 할 수야 있지만, 그 시기였기 때문에 더 좋은 순간. 이런 행복을 잘 찾아 먹자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그 후로 매 시기마다 친구에게 연락할 때 꼭 꺼내는 이야기는,
‘여름인데 몸보신하러 가야지. 백숙? 장어?’
‘가을엔 전어지. 전어 맛집 찾아보자!’
‘겨울인데 방어 못 먹었어. 노량진 갈까?’
이런 종류다. 그 시기에 누릴 때 가장 좋을만한 것들. 나는 스쳐 지나가며 봐도 한국인이기에 밥이 제일 중해서 그런지, 대체로 제철 음식에 한정되지만 뭐든 어떠랴. 먹는 것보단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 시기에 잘 큐레이션 된 전시회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계절을 담은 아끼는 책을, 영화를, 음악을. 그 시기를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지 않을까. 시절마다 좋다는 거, 남들도 즐기고 사는 그런 거.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고 바로 곁에서 찾자고, 그렇게 결심했다.
그래서 아직도 못 먹은 떡국이 못내 아쉽다. 한 번 만들어볼까, 하며 레시피를 찾아보니 요리에 취미가 없는 내겐 약간 번거롭다. 떡국을 파는 식당을 찾아보니 맛있다는 집은 다들 멀리들 위치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랑 둘러앉아 한 살 더 먹는다고 우스갯소리 하며 넘기는 떡국이 아니라서, 영 그 맛이 그 맛이 아닐 것 같다. 다음 설엔 내 몫의 떡국을 놓치지 않고 한 살 잘 챙겨 먹어야겠다.
#Cover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