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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램프 Aug 31. 2023

정리된 찬장

(저는 책장이 아닌 찬장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될 수 있으면 일주일에 꼭 2번은 글을 쓰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정들이 생기면, 브런치에 글을 쓰기는커녕 해야 할 일들을 손대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내게 된다. 저번주에 나도, 남편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하는 준비단계로 많이 바빴다. 사람들을 만나 미팅도 해야 했고, 여러 업체의 결과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물론 이런 말들은 다 핑계에 불과하고 몸이 바빴다기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9월의 새로운 일의 시작점을 앞두고 일을 정리하다 보니, 집안에 쌓여만 가는 잡동사니들을 이번 기회에 치우지 않으면 다시는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을 틈틈이 정리하고, 대학교 때의 전공서적을 아직도 책장에 박아두던 나는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을 과감히 분리수거함으로 보내버렸다.  

오히려 책장보다 나의 찬장은 현재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들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다 찬장문을 열어보고는 갑자기 여러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1년 동안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내가 아낄 수 있는 부분은 아끼며, 돈이 없는 대신 시간 부자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라고 나는 원래 검소한 사람도 아니고, 돈을 쓸 때 소비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나의 기분을 풀어줄 목적으로, 아니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것도 아니면 매일 일만 죽어라 하는데 내가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도 못하면 억울해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심정으로 정말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잠시 1년간 멈춤을 하면서 나의 소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고, 내가 정말 필요해서 물건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계기는 사용하지 않은 수많은 옷과 화장품들이 방안에 쌓여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직후였고, 그 순간 1년간은 옷과 화장품을 사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었더랬다. (처음 시작은 정말 이렇게 단순했다.)


하지만 1년 동안 백수로 살아보니, 나의 호기로웠던 순수한 다짐들은 살짝 경로를 이탈한 느낌이 들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을 때, 더 이상 구매능력이 없어 구입하지 못하는 상황들이었는데, 밖에 나가 친구와 지인들을 만날 땐 내가 원해서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나를 보았을 때, 왜인지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왔다 갔다 하는 나의 마음 상태처럼 나의 책장은 항상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만하면 괜찮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매번 나는 책장을 볼 때마다 더 이상 보지 않는 책들을 처분하고 싶은데, 정리를 하고 그다음에 보면 또 눈에 거슬리는 책들이 나온다.


하지만 찬장을 열어보았을 때, 오히려 나는 찬장에서 위로를 받았다! 아직은 검소함을 배워 나가는 단계이지만, 유리병이 나올 때마다 그냥 버리기보다는 깨끗이 씻어서 잘 말려 놓는다. 입구가 작은 예쁜 병들은 꽃이나 화초를 꽂아 놓기도 하고, 입구가 큰 병들은 다른 음식들을 넣어서 냉장고에 진열을 해 놓는다. 갈색과 유리로 된 찬합은 어머님이 주신 것들인데, 특히 갈색은 예전에 아버님이 학교에서 근무하실 때 들고 다니신 도시락이라고 했다. 원래는 어머님이 버리려고 하신 것을 내가 쓴다고 가져왔는데, 의외로 밖에 도시락을 싸서 나갈 때 찬합이 커서 이것저것 넣기도 좋고, 마지막에 보자기로 이쁘게 묶으면 어렸을 때의 추억들도 묻어나는 찬합통이다.


원두커피 그라인더는 친구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나에게 준 것이다. 약간 사연이 있는 물건이라 처음에는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버리지 않고 내가 사용해 주길 원하는 친구의 맘이 느껴져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직도 잘 사용하고 있다. 커피 그라인더 옆에 거북이 양초는 동생이 하와이 여행을 갔다 오면서 기념품으로 사 온 선물인데, 이 양초를 볼 때마다 조카의 어렸을 적 모습이 떠올라 괜스레 얼굴에 웃음이 머문다.


거북이 양초 뒤에 학 1000마리가 두 개의 병에 이쁘게 담겨 있는데, 우리 엄마는 젊으셨을 때 취미로 종이접기를 많이 하셨었다. (그때의 엄마는 손재주가 정말 좋으셨었다.) 원래는 500마리씩 접어서 하나는 내게, 다른 하나는 동생에게 선물했는데, 동생이 별로 내켜하지 않자 엄마가 너 다 가져라 하면서 주신 선물이다. 놀랍게도 이 종이학도 30년이 넘게 이사를 다닐 때마다 나와 함께한 친구가 돼버렸다. 종이학 옆에 메이플 시럽은 캐나다 여행 때 사온 시럽인데, 내가 워낙 달달한 것도 좋아하지만 병이 특이하고 예뻐서 하나만 남겨놓고 다른 것들은 정리를 해 두었다.


그것 말고도 남들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소소한 물건들이지만, 나는 찬장을 열어볼 때마다 나만의 추억을 떠올린다. 책장을 볼 땐 지금까지 내가 일한 발자취가 녹아 있어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다면, 찬장을 바라볼 땐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떠올라 이렇게 힘든 인생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준 그들이 있어서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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