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요원 Aug 22. 2020

순리

[e-book]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법정스님의 재가제자 정찬주 작가가 스님을 추모하며 당신의 말씀과 생전 일화를 암자 같은 저자의 남도산중 산방에서 담백하게 담아낸 인생 에세이이자 명상록이다. 스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활상과 견주기도 하며,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순리의 삶이란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기억해 두고 싶은, 함께 나누고 픈 글귀와 말씀들이 많은 걸 보니 나 또한 수양이 절실한 인간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내가 반한 글귀들 그리고 말씀들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30/328)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닌 새날이다. 겉으로 보면 같은 달력에 박힌 비슷한 날 같지만 어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사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33/328)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피어남이다. ... 삶을 소유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이니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새롭게 발견되는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34/328)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시간을 함께 나눈다든가.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도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외떨어져 독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다.(35/328)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순리대로 살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정신으로 살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37/328)


행복하다고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것이 행복의 법칙인 듯하다. 반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해지는 것이 불행의 법칙이다. 행복의 조건은 정신에서 찾아야지 물질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 정신은 영혼의 해방구이고 물질은 소유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긍정과 배려, 평화와 자유, 내면의 성장, 소욕지족, 주체적인 삶, 고마움과 감사, 공감과 교감, 관조와 사유, 심신의 건강 등등이 행복한 에너지를 주는 필요조건들이 아닐까. 생각과 태도를 바꾸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하려면 행복해지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습관은 내 운명을 결정짓는 상수이다. 변수가 아니다.(39/328)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實)로서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허(虛)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정신은 너무나 많은 일에 분산되어 제정신을 차리고 살기 참으로 힘들다. 내가 내 인생을 자주적으로 산다기보다는 무엇인가에 의해 삶을 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80/328)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된다.(80/328)


마음을 비우려면 무엇엔가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쓸데없는 대화를 피해야 한다. 홀로 있으면서 발가벗은 자기 세계를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명의 소리는 우리 마음을 자꾸 어지럽힌다. 거기에는 생명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완벽한 생명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듣는 마음을 정결하게 밝혀주고 편하게 가라앉혀준다. 자연의 소리는 굳이 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만이 아니다. 더 원천적인 자연의 소리는 내 마음에서 울려오는 소리이다.(82/328)


가랑잎 밟기가 조금은 조심스럽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누워 있는 가랑잎 하나에도 존재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넘어다볼 수 없는 그들만의 질서와 세계가 있을 법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로 거기 그렇게 존재한다.(86/328)


어떤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이쪽에서 따뜻한 마음을 열어 보여야 저쪽 마음도 열린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88/328)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내 마음이 착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드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하고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118/328)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 못지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 잡념 없이 기도할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121/328)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다운 삶을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하고 만다. 돈이나 물건에 집착하면 그 돈과 물건이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137/328)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무소유는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유보다 값지고 고귀하다. 소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151/328)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삶의 부피보다는 질을 문제 삼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 삶을 살 줄 알 때 사람일 수가 있다.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텅 비울 수 있어야 한다. 텅 빈 곳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려 나온다.(152/328)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153/328)


이름이 있기 전에 실체가 존재한 것인데, 어째서 우리들은 그 이름에만 매달리려고 하는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이 나인가? 묻고 또 물어도 나의 실체는 선뜻 찾아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실체가 없다면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름만 보고 실체로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이름은 언젠가 실체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마련이다. 이름은 한때의 명칭일 뿐 실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인을 두고 아무개를 많이 닮았다는 말은 보다 진실한 표현인지도 모른다.(176/328)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하는 삶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이런 생활 태도를 갖지 않는 한, 이런 생태윤리를 지니지 않는 한, 세상은 더욱 나빠지고 더욱 힘들어집니다.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면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재물이 인간이 할 일을 대신하게 되면 그곳에는 인간이 존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200, 201/328)


부처님이 강조한 ‘무아(無我)’란 바로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면 ‘바르고 완전하게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의 진리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그런 경험들을 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많을 때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도 바깥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망막에 상이 그려질 뿐 실제로는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복잡하면 눈앞의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226/328)


인생 공부 몇십 년 동안 미흡하나마 자각한 것이 있다면 길 끝나는 곳에 반드시 또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길이 끝나면 눈에 보이지 않은 길이 또 있는 것이다. ‘길 없는 길’과 같은 말이다. 길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세상과 자신을 사무치게 꿰뚫어 본다면 또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주장이고 착각일 뿐이다. 또 다른 삶이 분명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243/328)


자기 것이 많아서만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한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날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목숨의 신비가 그만큼 닳아진다는 것입니다. 그 소모되는 생명의 신비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인생은 자기 자신에서 끝이 납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인생은 이웃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252/328)


건축물은 하나의 형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혼이 들어 있지 않으면 빈껍데기나 다름없습니다.(262/328)


배움의 과정을 문(聞), 사(思), 수(修)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생각하며, 스스로 그렇게 실천하고 닦아 가는 것이 배움의 과정입니다. 


대화란 부르고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고 그걸 주제로 속의 말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277,278/328)


개울에서 만나 강을 이루고 산과 들, 그리고 대지를 적신다. 가장 넓은 자비의 바다를 이룬다. 가족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가족의 역사란 그런 것이다.(281/328)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마음의 주고받음입니다.(284/328)


자기 발 뿌리를 늘 살펴야 합니다. 남이 못했든 잘했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과연 이 대지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맑고 향기롭게 살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땅의 덕을 배워야 합니다.(300, 301/328)


지금은 훨씬 많은 것을 차지하고 살면서도 고마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운가에 달려 있습니다.(313/328)


우리는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은 자기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입니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316/328) 




작가의 이전글 선택과 집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