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기 계발

[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by 정요원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7.jpg

무능한 지도자에 의한 그런 세상이 다시는 오지 않길 바란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어지길 바란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 이순신 장군처럼 미리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그런 인재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장군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뛰게 한다. 내 안의 적이든, 나를 둘러 싼 외부의 적이든, 적은 결코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적은 결코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선조 시대 결정적 순간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1.jpg

난세에 영웅이 태어 난다고 했던가. 선조 시대에는 시절이 좋지 않았던 만큼 시대를 대표했던 영웅들, 인재들이 많았다.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정철, 유성룡, 권율, 김시민, 곽재우 ... 반면 시대를 더 악화시킨 인물도 있었다. 임금이 대표적이고 잘못된 판단으로 세상을 혼란에 바뜨린 김** 이 그렇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2.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3.jpg

모두의 스승 율곡 이이 선생이건만, 두고 두고 후회하는 결정을 내린적이 있다. 물론, 학문적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지만 불교에 입적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대스승다운 그 답게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장했다.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세상을 과감히 열어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중요한 일은 제대로 된 역사 바로 세우기!"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4.jpg

각 시대마다 숭상한 바가 있습니다.(가령 전국 시대엔 부국강병이었지요) 임금으로서 한 시대의 사조가 어떠한지를 살피고 사조가 잘못되었다면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옵니다. 정치를 하려면 먼저 시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임금이 잘하려는 의욕이 있어도 권신이 국정을 독단하거나 전쟁이 일어나 소란스러우면 뜻이 있어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다행이 지금은 권간이나 전쟁이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전하계오서 급급히 하셔야 할 때이옵니다.(선조 2년 8월 16일, 경연에서)

-

이대로 구습을 답습한다면 다시 기대할 것이 없게 됩니다. 반드시 위에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지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대신과 백료를 신칙하여 일시에 일으킴으로서 기강을 세워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나이다. 우리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은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오직 세종대왕의 정치가 참으로 본받을 만한데 그 때는 사람을 쓸 적에 상례에 얽매이지 않고 어진 사람에게 맡겼으며 재능 있는 사람을 부려 각기 그 능력에 맞게 하였으므로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의 분수가 정해졌습니다. 조광조는 중종의 지우를 받아 큰 일을 할 의망이 있었으나 연소한 사류로서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못하여 소요를 면하지 못했으므로 소인이 틈을 타서 사람을 해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을 맡은 자들이 기묘년의 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기묘년의 사람들이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으나 어찌 오늘날 전혀 하지 않은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선조 6년 10월 12일 면대하고서)

-

민생의 극심한 폐해를 바로 잡으려면 옛법을 경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법이 오래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기는데 이는 고금의 공통된 걱정거리이옵니다. 폐단이 큰 엣법을 그대로 두고 경장하지 않은다면 진실로 착한 정치를 기대할 수 없사옵니다.(선조 7년 2월 1일 경연에서 조조, 당 대통 등에 대해 논의한 뒤)

-

(오늘의 형세는) 반드시 경장을 한 뒤에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형세이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경장을 말하면 일 만들기를 좋아한다 하니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조정에 좋은 계책과 정직한 의논이 귀에 가득할지라도 핵성의 곤궁과 재정의 곤궁엔 아무런 도움이 없어 마침내는 난망하고 말 것이옵니다.(선조 8년 6월 24일 아뢰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5.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6.jpg

선조때에는 또한 분당의 시기이기도 했다. 동인, 서인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에도 율곡 이이는 생각이 달랐다.

-

"다수라고 곧 정의일 수는 없는 법. 의겸과 효원의 다툼을 논한다면 둘 다 잘못이나 재능을 말한다면 둘 다 쓸만하다. 또 효원은 우수하고 의겸은 용렬하다고 한다면 말이 되지만 효원이 옳고 의겸이 그르다고 하는 건 사리상 옳지 못하다."

-

모든 사람이 자기 편만의 말이 옳다고 할 때, 소신있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그다. 그래서 모두의 스승이겠지.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7.jpg

분당의 여파였는지, 아님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정여립 역모사건도 이 때 일어났다. 주모자 정여립이 자살해버림으로써 수사는 주변인들에 대한 고문에 의존하게 되었고, 여러 의혹이 뒤따랐다고 한다. '반역한 게 사실일까?', '왜 죽도로 도망갔지? 문서들도 폐기하지 않은 채...', '자살 맞어? 죽여 놓고 자살이라고 발표한 거 아냐?'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08.jpg

정여립으로 인한 옥사(기축옥사)는 2년 가까이를 끌었다고 한다. 죽은이만도 수백명. 역모사건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이 사건 역시도 분당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동인에 대한 서인의 정치보복. 그런데 사실 이 옥사를 주도한 이는 정철이라기보다는 선조라고 해야 옳을 것이라는 말도 있는 듯 하다. 서인 유생들의 상소에 힘을 실어주어 옥사의 확대를 부른 이도 선조였고, 고문으로 죽는 이가 속출하는 데도 제지하기는커녕 끝까지 이런 입장을 견지했다고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선조는 왕권강화라는 어쩌면 분명한 의도를 갖고, 동인과 서인을 이용한 것 같다. 어느 때는 동인을, 동인이 힘을 얻었다 싶으면 서인을 지원하면서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정했던 것 같다. 무서운 임금이었다. 그러나 나쁜 임금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에 몇 왕조는 수정실록을 편찬했다. 기록이 부실하고 편향적이라는 명분에서다,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이에 해당한다. 선조실록은 동인 정권에 의해 기록됐다. 그렇다보니 서인 정권 쪽에서는 마땅해하지 않았다. 결국 전례없는 수정실록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악의적인 내용이 너무 많다는 이유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선조실록은 전란으로 사초가 거의 다 소실돼 버려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며, 기록이 전혀 없는 달이 부지기수이며 있는 달조차도 다른 실록의 하루지 기록도 안되는 게 태반인 형평이어서 말과 행위로 판단할 충분한 근거를 못 준다는 것이었다.

-

서인측은 선조수정실록이 서인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고 한다. 유성룡이 저술한 징비록의 시각을 그대로 수용해 동인인 김성일을 높이고 서인인 황윤길을 깍아내렸는가 하면 심의겸, 김효원에 대한 기사에서도 심의겸을 편들지 않았으며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묘사했다고 한다.

-

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수정실록을 제작하였다고 해서 먼저 제작된 기존 실록을 없애지 않은것도 대단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2.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3.jpg

정여립 사건으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고 북인의 반격으로 긴장된 정국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조선을 둘러싼 주변의 정세는 격변을 거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13대 황제 신종(만력제)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팽개치고 신하들 사이의 파쟁이 계쇡되어 국세가 약화되어가고 있던 반면, 북방에서는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여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온 전국 시대가 오다 노부나가와 그를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해 끝나고 전국이 통일되었다. 100년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자신감, 끝없는 전쟁을 통해 정예로 훈련된 수십만의 군대. 지금은 제압되어 수하에 있지만, 여전히 독립 지향적이고 욕심많은 영주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담한 구상을 세운다. 중국을 삼켜버리겠다는 계획이 그것이고, 조선을 그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

이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심을 읽은 휘하의 무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측근을 사신으로 삼아 조선으로 보냈다. ... 일본은 거듭 사신을 통해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했고, 아무래도 상대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조선은 마침내 통신사 파견을 결정했다. 선조 23년 3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이끄는 통신사 일행이 바다를 건넜다.

-

조선 통신사의 일본 내 활동과 귀국 후의 행동에 대해 실록은 거의 기록을 전하지 않고, 수정실록이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기록은 부사인 김성일이 일본 측의 무례를 꾸짖는 등 시종 당당하게 행동에 일본측의 존경을 샀지만,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은 겁을 집어먹었다거나 재물 확보에만 급급해 일본측이 비루하게 여겼다는 등 김성일 칭찬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다. 사실 그랬다. 김성일은 이황의 애제자로, 후배들 사이에서는 유성룡 못지 않은 평판을 받던 인물. 그러나 교양 있는 유자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쳤기 때문일까? 정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신 황윤길 아뢰옵니다. 저들은 틀림없이 공격해 올 것으로 신은 보옵니다.

신 김성일은 그런 낌새를 발견하지 못하였나이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4.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5.jpg

선조 25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결정짓고 총동원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수십만 대군이 나고야로 집결하고, 이 정보는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그랬음에도 경계조차 게을리 한 조정이었고 일선 장수들이었다. 때문에 조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침략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 나서야 침략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상륙을 저지시키기 위한 해전 한 번 없었다. .... 그러나 조선군의 매운 맛은 거기까지였다. 경상 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도로 나가 밖에다 진을 친 다음 전투가 시작되자 도망가벼렸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성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고, 경상 우수사 원균은 무기와 배를 바다 속에 밀어 넣고 도망했다. 군대가 거의 흩어졌음은 물론이다. ... 고니시의 제1군에 이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이끄는 22,800명의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11,000명의 제3군이 4월 18일, 19일 차례로 상륙했다. 그렇게 5만여 명의 선봉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을 계속했다.

-

한심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화가 치민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6.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7.jpg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새벽같이 피난길에 나섰다.(선조25년 4월 30일) 파천 반대를 부르짖던 신하들도, 궁궐 호위를 맡은 감사도 거의가 달아나버려서 호종하는 종친, 문무관이 100명도 안 되는 초라한 피난행렬이었다. ... 왕이 떠난 궁궐은 백성들의 습격을 받았다.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을 불질러버린 것이다. 실록의 사초도, 승정원일기도 이 때 모두 불에 탔다. 노비문서를 보관하고 있던 장례원도 불탔고, 원성이 표적이 되어온 형조 관아와 임해군의 집 등도 불탔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8.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19.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0.jpg

45세에 전라 감사의 군관이 되어 조방장을 겸했고, 정읍 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으로 이름을 알리더니 진도 군수, 배포 첨사를 거쳐 1591년 2월 전라 좌수사에 제수된다. 애초 이 자리에는 원균이 임명되었는데, 이전 고을에서의 성적이 나빴다는 이유로 이내 교체된 것.

아직은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 태산처럼 고요하고 무겁게 행하라!


조선 수군은 넓게 학익진을 이루어 포위에 들어가다가 벼락같이 일제히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그동안 일본 수군의 기본 전투양식은 접근하여 올라간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여기에 조총까지 갖추었으니 바다에서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고 여겼으리라. 예기치 않았던 화포 공격에 혼비백산한 그들에게 조선 함대가 빠르게 접근해왔다. 화포에 뒤이은 조선 수군의 공격은 더 두껍고 튼튼한 판옥선을 이용한 충돌 공격. 그리고 일본 배보다 더 높은 판옥선 감판 위에서의 화살 공격. 적선 26척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적들이 수장되었다.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부상 1명! 암도적인 승리였다. 슬이에 자신감을 얻은 수군은 이어 합포에서 다시 5척, 이튿날에는 적진포에서 11척을 추가로 깨뜨린 뒤 개선하였다.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제 싸움(한산도 해전)에 패하면서 한 팔이 끊어진 셈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평양성을 점령한 유키나가라 할지라도 지원군이 사라지게 되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존하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까지 지키게 됨으로써 군량의 조달과 통신 체계가 확립될 수 있었다. 이는 곧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동과 천진지방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되어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를 통해 우리나라를 구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순신이 한 번 이긴 결과였다.

<징비록> 유성룡,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70P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1.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2.jpg

왕은 이르노라. 지난 번에 그대의 직책을 갈고 그대로 하여 죄를 지고서 백의종군케 한 것은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해서 그리 된 것이다. 이제 패전의 욕됨을 만났으니 더 이상 문슨 말을 하겠는가? 이제 그대를 ...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

저 임진년으로부터 오륙 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순군이 그 길목을 누그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열두 척이 있나이다.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해볼 만하옵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는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 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터인데 신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3.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4.jpg

선조 31년, 전쟁과 학살의 지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 일본군은 끝까지 만만치 않았다. ... 이순신은 단호했다.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적은 결코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5.jpg
KakaoTalk_20220101_165206480_26.jpg

적을 물리친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힘이고, 자기 나라 군대는 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에 싸우다 죽은 일선 장수들보다 자신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지원을 청한 이들의 공이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이 전쟁과 관련한 선조의 기본인식이었다.

-

선조는 피난 가는 수모를 겪고 수십번의 선위 쇼도 선보였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10년 넘게 왕좌를 지켰다. 이때까지의 임금 중 최장인 40년 8개월의 재위 기록을 자랑한다. 어린 나이임에도 명종 앞에서 기지를 발휘해 형들을 제치고 강한 인상을 심었을 만큼 머리 회전이 빨랐고, 현실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 전쟁 과정에서도 전황의 흐름에 대해서나 어떤 일의 가능 여부에 대해 신하들보다 더 현실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는 했다. 신하들의 대책 없는 서울 사수 주장을 무시하고 피난을 강행했고, 윤두수 등이 독자작전을 주장할 때도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재침 결정이 전해졌을 때도 선조의 판단력은 돋보였다. 문제는 책을 지려 하지 않는 태도였다. 자기 생각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고 꼬리를 뺐다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게 주특기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