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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들 - 이종건

속수무책이란 말인가 ?

by 정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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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건축계를 냉철하면서도 소신있게 발언하는 분 중 한분이 바로 이종건 교수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그의 책들은 항상 나를 그리고 우리 건축계를 부끄럽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한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책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들>은 그의 전작 <건축없는 국가>에 이은 책으로 건축계의 부실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가치 있는 이슈의 생산과 논의 구조를 통한 건축계의 구축이 급선무임을 제안한다.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는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각에 기준하여 여러 매체에 발표된 글을 특정 주제로 다시 묶어낸 이 책의 궁극적 열쇠어는 건축 비평, 비평가의 정위에 관한 것이다.

책은 크게 8개의 주제로 나뉘어졌 있다. 윤리, 공공성, 말, 테러_자본주의_스타건축가, 유목성과 기술, 현대성_시적 거주_도시성, 역사보존, 페티스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8개의 주제와 함께 서문에 해당하는 글 '문제없음의 문제'도 게재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글로 생각한다. 이 글은 베니스 비엔날레 2014(베니스 비엔날레는 짝수해에는 건축을 주제로 개최된다)를 위해 쓴 것을 보충하고 고쳐 다시 쓴 것이라고 저자가 덧붙이고 있는데 직접 읽어 보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이를 나름대로 좀 장황하게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저자는 우선 많은 건축인들이 우리 건축사회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는 말을 전한다. 그러나 그들이 건축에 문제가 없다고 하는 말에는 정말로 문제가 없기에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우리의 건축사회에 문제가 있어도 주체자들은 문제될 바 없다 여기고 있기 때문(8p)이라고 하고 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는 사회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문제없음의 문제이다.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또 무엇이 문제인가? 저자는 건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저자는 '우리나라에는 건축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적 현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까지, (서구)철학이 없었던 것과 정확히 꼭같이, 문화로서든 기술이나 학의 체계를 이룬 분과로서든, 존재한 바 없었다'(11p, 12p)고 하고 있다. 학의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건국대 이상헌 교수의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 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더불어 그는 우리에게 건축이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우리는, 건축의 출현과 전개과정을, 오롯이 제국건설에 동원되는 기술자라는 식민주의 틀 안에서 경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12p)이고, 군사독재정부가 이십 년에 걸쳐 반공이데올로기 강화와 경제발전에 총력을 쏟음으로써, 건축을 건설의 등가어 혹은 부속어로 체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12p)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정작 우리가 끈질기게 모색하고 천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논제가 있는데 '그것은 곧 '오늘날 이 땅에서 건축하기' 의 의미와 방식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왔고, 그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가? 그리하여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15p)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저자는 오늘날의 이 땅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말하고 있다. '단기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문화적 층위에서 한국인의 쏠림과 빨리빨리의 특성을 형성시켜, 주체화 의지의 결핍과 잉여욕망의 비속화를 초래했다. 무비판성과 일종의 문화 사대주의도 초래했다', '우리의 도시 건물들은 모두 제 각각의 형상으로 어떤 조화의 몸짓도 없다', '따라서 건축을 예술이나 문화로 간주한 경험도, 그러한 바로서의 건축에 대한 인식도 없다'(16p), '제법 괄목할 만한 건축적 성과도 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바친 에너지와 시간에 비하면 그것은 턱없이 보잘 것 없는데, 근본적인 이유를 추론컨대, 거기에는 스스로 부과한 '건축에서의 전통계승' 과업을, 니체가 언급한 "비판적 역사주의"에 무지한 채 몰두해 왔기 때문이다'(17p) 라고 하고 있다. 과정보다는 결과에 주목한 나머지, 이룩한 결과를 빨리 보여줘야만 했고, 우리의 생활양식이나 문화 등과는 상관없이 선진국의 것들이라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떠한 조화의 몸짓도 없었고 결국 건축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무엇을, 왜 받아들였는지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어서 저자는 '다시 말하건대, 문제는 역사에 대한 태도와 해석이다', '거의 대부분의 당대 지식인은 역사를 기념비나 골동품으로 대했는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의 역사를 성리학의 이념에 기초한 선비정신이라는 특정 문화에 한정함으로써, 그나마 희소하고 희박했던 잉여욕망을 구속했다는 것이다(17p)' 라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건축욕망 또한 쏠림덩어리로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단단히 붙잡혀, 현대건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정크스페이스의 빨리빨리 노정에 놓여 있다', '현대적 삶과 치열하게 대질시켜 그 조건 안에서 새롭게 구성해낼 비판적 안목과 해석학적 작업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학문적으로 처참한 것은, 우리 현대건축과 그 역사를 해석하고 기술해내는 시각이, 비판적이기는 고사하고, 엄밀히 말해, 지금도 충분히 이론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비판성이 없으니, 우리의 건축적 사실들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업적이, 현재와 미래 시점의 문제의식을 결핍하고, 그러한 까닭에,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단순한 현실적 물음에 속수무책이다.(역사적 탐구/연구가 도구적이 아니라, 현재의 활동을 구성해나가는 지반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의 가치는 오직, 오늘, 그리고 나아가 내일의 삶의 환경을 그로써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19p)' 라고도 하고 있다.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아직도 진정성보다는 빨리빨리 노정에 놓여 있으며, 비판적 안목과 해석학적 작업이 턱없이 부족하고 학문적으로도 충분히 이론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비판성이 없다보니 우리의 건축계는 현실적 물음에도 속수무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가 문제없음의 문제에서 지적한 문제, '오늘날 이 땅에서 건축하기' 의 의미와 방식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다. '그리하여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지구촌이 직면하고 있는 갖가지 중대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만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비정신과 화쟁 철학이 대표적이라고 하였다.

8개 키워드로 이어질 내용들은 모두 이 문제없음의 문제에 대한 좀 더 세밀한 그리고 냉철한 비판의식이 담겨있다. 물론 '그리하여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담겨있다. 그 중 문제없음의 문제와 같이 이러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은 다른 몇 구절을 기록해본다.


지식의 추상성과 허약성은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 모든 것이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에서 건축은, 더 이상 집단의 이상을 드러내는 물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건축은 이제 물로서가 아니라 자본의 힘들이 부딪히는 장으로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집단의 기억과 희망과 이상을 물체로 붙잡아 두고자 하는 건축적 열망은, 비판의 가치마저 소지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것으로 주장되었고 증명되었다. 건축은 도시건축은, 그리고 건축의 기념성은 역사 속에 사장된다. 이제 건축가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한 사람의 개인으로 마주선채, 자신이 겪는 삶의 개인적 경험들과 에피소드들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외로운 형국에 처 했다. 건축은 이제, 개인의 독백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기껏해야 각종 힘들을 구성하는 다이아그램으로 출현할 뿐이다. 건축은,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오던 전통적인 건축은 오래 전에 죽었다. <1. 윤리문제 1.1. 부귀영달인가 덕목인가? 29p>

이 지점에서 환기해야 할 논점은 두 가지인데, 첫 째,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적 건축 태도/방식(정직성, 공정성, 존엄성, 공동체 고려/배려 등)과, 건축이 윤리적이라는 것 곧 윤리적 건축은 별개의 이슈라는 것, 그리고 대체로 최소한의 도덕이라 일컫는 법의 규정들로는 윤리적 건축을 제대로 상고할수 없다는 것이다. <1. 윤리문제 1.2 윤리적 건축 42p>

그런데 문제는, 특히 건축과 조경과 도시 등 물리적인 공간을 디자인 연구/탐구 주제로 삼는 분과에 속한, 소위 전문가라 일컬어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공성의 개념을 초보적인 견지에서 이해하고 논의해 온 탓에, 정확히 말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까닭에, 그로써 특별히 공공성에 걸맞은 이슈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은 공공성이라는 근사한 말로, 정작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건축의 윤리적 차원을, 그것도 오래 전부터 건축설계(교육)의 기본기로 보편화된 덕목(건축가는 자신이 떠 맡은 건물을 설계할 때 그 건물이 들어설 주변/맥락을 고려/배려해야 한다)을 거듭거듭 거론해 온 탓에, 정작 공공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실종된다는 것이다. <2. 공공성 문제 2.2 건축과 공공성 54p>

이로써, 도시가 풍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결국, 원시자연과 같이 규정될 수 없는 대상을 건축가가 자신의 특정의 방식으로 샘플링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곧 건축가가 도시를 어떻게 읽느냐, 그러니까 어떤 계급의 시점에서 혹은 어떤 가치의 틀로 읽어내느냐 하는 도시 읽기를 전제로 하게 된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사람, 돈은 없지만 시간은 있는 사람,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 사람은 각기 다른 통행의 방편으로 도시를 횡단함으로써 서로 상이한 풍경을 접하게 될 것이고, 거주지가 강남이냐 강북이냐 혹은 서울외곽의 위성도시냐, 그리고 일터가 어디냐에 따라 서울공간을 장악하는 범위와 시야가 다를 것이고, 그뿐 아니라 직업에 따라, 그리고 그것에 따른 하루의 주활동시간에 따라 도시는 무수한 표정과 경험을 낳을 것이 뻔하다. <6. 현대성, 시적 거주, 도시성 문제 6.1. 조성룡 건축 비평 187p, 188p>

사실 그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 건축가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정작 현대성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개입이다. 딱히 인문학뿐 아니라 삶의 모든 양상에 이미 구조화되어 있는 현대성의 문제가 건축적 사고나 작업 속에 부재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이에 대한 차후의 연구가 절실하다. 그뿐 아니라, 건축의 본질에 대해 묻고, 그것과 대질하고, 그리하여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작업이, 조성룡과 더불어 우리건축에 전반에 거의 전무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지 큰 수수께기다. 본질이라는 언어가 무겁다면, 건축성에 대한 규정, 말하자면 건축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적 활동, 곧 예술사가 그러하듯, 적어도 자기참조(역사 혹은 동시대) 의식, 그러니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변증법적이든, 앞선 그리고/혹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건축을 이식하여, 건축의 모태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그것을 향상시키든 혹은 그것과 다른 궤도를 그리든, 말하자면 역사와 시대성을 첨예하게 의식하고 그에 따라 독자적으로 반응하는 몸짓이 없다는 것 또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하다. 마지막으로, 자연주의(인간과 자연의 화합)가 여전히 우리건축에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상 또한, 어떤 견지에서 해명할 수 있을지 만만하지 않은 과제다. <6. 현대성, 시적 거주, 도시성 문제 6.1. 조성룡 건축 비평 206p>

그리 대단치 않은, 적절한 만큼의 명성과 교보의 어떤 상업적 욕망이 결합한, 그래서 건축학적으로 별 가치 없는 결과에 우리 언론들이 보여주는 주목이 나로서는 적지 않게 씁쓰레하다. 특히 적지 않은 기업의 건물들이 주변 도로들과 만나는 지점에서 보여주는, 시민들을 위한 사회적 공간의 배려에 극히 인색한 모습을 보면 더 그렇다. <6. 현대성, 시적 거주, 도시성 문제 6.3. 교보 식 건축전략의 씁쓰레함 219p>

일상적인 삶의 질을 고려하는 보편적인 인식의 틀 안에서 생각해 보건대, 가능하기만 한다면 옛 건물들이 가급적 많이 그리고 오래 잔존하는 현상은, 여러 측면에서 유익하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장소에 대한 기억이나 회상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아, 바로 그것을 바탕으로 개별적으로 동강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의 내용들을 타자와 더불어 공유하고 또 소통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7. 역사보존 문제 7.1.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 2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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