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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요원 Apr 04. 2020

경계

[e-book] 군주론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나에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들게 한 이유는 단 한가지 였다. 1532년에 출판되어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는 타이틀 때문이었다. 우선은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오로지 선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이나, 악마의 책이라 불리며 스탈린, 히틀러 등 독재자들의 정치 교본이었다는 말들도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런 책이 왜? 고전이 되었을까? 또한 이 책은 21세기 현재 모든 리더들의 필독서라고 했다.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요즘 책방, 책 읽어 드립니다 에서 양정무 교수가 말하였 듯, 뭐든지 이면을 봐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읽는 내내, 그 내용의 사악함? 으로 불편하면서도, 강독을 해줬던 설민석 강사의 말처럼 어쩌면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 책이기도 했다. 더불어, 비 전문가로서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읽기전 전제 되어야 할 사실이 있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오해없이, 편견없이 시대상과 견주어 읽되, 마키아벨리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저의는 무엇이었는지를 깊게 생각해 가며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순간 순간 떠오르는 말들을 기록해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저의는 무엇이었는지를 깊게 생각해 가며 읽어야 한다그리고, 군주가 된다는 것은 권력을 쥔다는 것 또는 권력을 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연애하는 것 같이 쟁취와 헌신이 필요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본성을 잘 알아야 군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으며, 그 본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더 큰 화가 나에게 닥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간 살아오면서 느꼈던, 배웠던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었으며, 그 무엇 하나도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며 다의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제의 정의가 오늘의 불의가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일이 지금 여기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때로는 처세술도 배울 수 있었다. 비겁한 것 같지만, 일관되게 행동하지 말고 때로는 밀림의 왕 사자처럼, 때로는 약삭빠른 여우처럼, 위협을 가하다가도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등 야누스적인 말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이 인생이고, 군주라고 말하고 있다. 좋게 말하면 유연해야 한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은 상황에 맞게 권력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이 가장 상식 밖의 말이며,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나는 군주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말이기도 하다. 터무늬없이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작금의 정치인들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전제주의 시대의 군주들 처럼 그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따르고자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다. 그들의 행태가 그 오랜 옛날과 똑같다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군주는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는 점이 가장 그러하면서도,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소신과 결정과 약속들을 헌 걸레짝 버리듯이 모르쇠한다거나, 손바닥 뒤집듯 바꿔 버리기도 하기에 참으로 세상 살아가는 것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나, 모두 다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어려움에 처한다. 이 것과 저 것을 반드시 선택해야 하며, 그 선택이 나를 좌지우지 할 상황인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모르는 순간들이 나이가 들어갈 수록 많아지며,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는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라는 고민이 든다면 짬짜면을 먹는것이 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 이 책을 읽은 나의 감상이다.


요즘 책방, 책 읽어 드립니다 방송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경일 교수가 전한말도 기억에 남는다.


"모든 세대는 전 세대보다 더 복잡하고 다음 세대보다 단순하다."


재충전의 시간, 유배 아닌 유배의 시간을 잘 활용하라는 것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으며 익힌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이다.


기록해두고 싶은 구절들


그리고 단테가 지식은 기억으로 간직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못한다고 말하듯, 나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배운 것을 적었고 군주론이라는 작은 책을 지었네. 여기서 나는 이 주제에 관한 사유 속으로 내가 갈 수 있는 한 깊이 들어가, 군주국이란 무엇인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획득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상실되는지를 논하고 있다네.(20/255)


처음부터 마키아벨리는 그가 다룬 가장 전통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도 독창적인 접근 방식을 주장했다. 이상적 군주에 관한 이전의 인문주의 논문들은 일반적인 윤리적 원칙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 통치의 목적, 그리고 이 양자와 덕 있는 삶에 대한 추구의 관련성에서 출발했다.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실제 있는 그대로 다루겠다고 대담하게 주장했다. 그는 모든 군주국을 두 개의 범주, 즉 신생 군주군과 기성 군주국으로 나누고, 어떤 가치 판단도 없이 군주가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각 경우 무엇을 해야 할지를 설명했다. 이전의 논문들은 군주는 무엇보다도 선해야 한다고, 즉 전통적인 의미에서 덕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정했다. 본질적으로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와 프란체스코 파트리치 같은 작가들은 군주가 닦아야 할 덕과 군주가 피해야 할 악덕의 긴 목록을 제시하고 각각을 고전 자료에 나오는 풍부한 예로 뒷받침했다. 그들의 태도는 당대의 현실을 반영했다. 인문주의 작가들은 왕들이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명성도 추구한다는 것을 인정했고, 왕들의 인색함보다는 문화와 학문에 대한 그들의 후한 지원을 칭송했으며, 때로 상당한 심리학적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끊임없이 덕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덕이라는 말을 많은 의미로 사용했거니와, 선악에 대한 어떤 질문과도 무관하게 신민과 왕국에 대한 지배력을 지키는 데 필요한 기본 능력의 의미도 그 안에 포함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종종 독자에게 전통적으로 기독교적 의미에서나 봉건적 의미에서 덕 있다고 여겨진 자질들은 군주에게는 전혀 덕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예컨대 후함은 가장 잘 확립된 군주적 덕목의 하나였다. 하지만 후함을 심각하게 추구하면 낭비에 이르고, 과시에 이르고, 군주의 부를 탕진하기에 이르고, 신민들을 탄압하기에 이르고, 결국에는 군주가 신민들에게 경멸과 미움을 받는 사태에 이르고야 만다. 덕-자신의 국가와 자신의 권력을 영속하는데 필요한 자질의 의미에서-을 진실로 이해하는 군주는 후함의 덕보다는 인색함의 악덕을 더 좋아할 것이다. 재삼재사 마키아벨리는 정치 이론에 관한 공식적인 글에서 전통적으로 강조되고 칭찬되던 가치를 일변시켰다.(22,23/255)


현재의 분란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분란에도 대처하고 그에 대해 부지런히 예방하라. 분란이 미리 제대로 감지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질병이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린다면 이미 치료가 불가능해졌을 것이기 때문에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의사들이 소모성 질환에 대해 말하기를, 초기에는 치료하기는 쉬우나 진단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초기에 진단해서 치료하지 않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하기가 어렵다. 정치에서도 그렇다. 정치적 무질서는 미리 제대로 보면 쉽게 고칠 수 있다. (그런데 오직 현명한 통치자만이 이와 같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다.) 진단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치적 무질서가 모든 사람이 인식할 만큼 커지도록 방치되면, 치료는 너무 늦은 것이다.(49/255)


시간은 모든 것을 휘몰아 오며, 악뿐만 아니라 선도, 선뿐만 아니라 악도 가져올 수 있다.(50/255)


인간은 일반적으로 회의적이며, 경험을 통해 시험해 보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을 결코 진정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67,68/255)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는 스스로를 두렵게 여겨지도록 만들되, 사랑은 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미움을 받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두렵게 여겨지는 것과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은 아주 쉽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는 신민과 시민의 재산을 노리거나 그들의 여인들을 탐하는 것을 삼간다면 항상 미움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를 처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이는 적절한 명분과 명백한 이유가 있을 때만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군주는 타인의 재산을 탐하는 것을 삼가야 하는데, 인간은 가산의 상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을 더 일찍 잊기 때문이다.(137/255)


군주, 특히 새로운 군주는 덕이 있다는 평판을 듣게 하는 성품들 모두를 지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주 신의, 자비, 호의, 믿음을 무시하며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운과 상황이 명하는 대로 변신하는 유연한 성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군주는 가능하다면 선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필요하다면 악행을 저지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143/255)


범인들은 항상 외양과 결과에 감명한다. 이 세상에는 오직 범인들밖에 없으며, 다수가 확고히 지지받고 있을 때 소수를 위한 여지는 전혀 없다.(144/255)


어떤 정부도 그들이 항상 안전한 경로를 채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가능한 행동 노선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이니, 하나의 위험을 피하려고 할 때마다 다른 위험에 마주치는 것이다. 현명함은 각 위협의 본질을 평가할 수 있고 차악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177/255)


지력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물을 혼자 힘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타인이 이해하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며, 셋째는 혼자 힘으로도 타인을 통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첫번째는 탁월하고, 두 번째는 좋으며, 세 번째는 무용하다. 따라서 판돌포는 첫 번째 종류의 지력은 가지지 못했다 해도 적어도 두 번째 종류의 것은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군주가 통찰력은 가지지 못했다 해도, 다른 사람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언제 장관의 행위가 좋은지 혹은 나쁜지를 알 수 있고 그에 따라 칭찬하거나 바로잡을 수 있다. 이렇게하여, 장관은 군주를 속일 엄두를 낼 수 없고, 따라서 잘못하지 않도록 조심한다.(179/255)


따라서 여러 해 동안 권력이 확립되어 있었던 우리의 군주들은 국가를 잃은 것에 대해 운을 탓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의 나태를 탓해야 하는데, 왜나하면 그들은 시대가 조용할 때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다가 (그리고 바다가 고요할 때 폭풍을 예상하지 못하는 이것은 인간의 공통된 약점이다.) 역경이 찾아왔을 때 처음으로 한 생각이 저항이 아니라 도망이었기 때문이다.(186, 187/255)


나는 운을, 화가 나면 평야를 덮치고 나무와 건물을 쓰러뜨리며 이곳의 흙을 휩쓸어 가 저곳에 쌓아놓는 난폭한 강물에 비유한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도망친다. 모든 사람이 그 기세에 굴복한다. 저항의 가능성은 없다. 이런 것이 강물의 본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물이 조용히 흐를 때 둑과 제방을 만들어 예방 조치를 취함으로써, 강이 범람할 때 강물이 수로로 흐르게 하거나 그 기세를 꺽어 덜 사납고 덜 위험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운도 마찬가지다. 운은 그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위력을 드러내며, 자신을 저지하기 위한 제방과 둑이 세워져 있지 않은 곳을 알고 거기로 기세를 돌린다.(188, 189/255)


신중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목적을 성취하고 다른 사람은 성취하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도, 한 사람은 신중하고 다른 사람은 과감한데도 똑같이 훌륭하게 성공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그들의 방법이 시대의 성격에 합당한가 아닌가 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따라서 내가 말했듯이, 두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데도 같은 목적을 성취할 수 있고, 두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일 하는데도 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다른 사람은 그러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번영이 왜 일시적인 것인지를 설며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인내심과 신중함으로 행동하고 시대와 상황이 이런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는 흥하겠지만, 시대와 상황이 변하면 그는 자신의 정책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정책을 이런 식으로 시류에 맞게 조화시키는 법을 알 만큼 현명한 사람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성격과 다르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거나, 한가지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늘 번영해 왔기에 새삼 스스로를 설득하여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은 상황이 과감한 행동을 요구할 때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망하게 된다. 만약 그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성격을 바꾼다면, 그의 운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190, 191/255)


위대한 고전이라 불리는 저작들을 막상 읽어보면 오히려 그 평범함에 놀랄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고전의 한 특징일 지도 모른다. 고전이란 그 고전이 나온 이후 인간의 삶에, 인간의 사유에 큰 영향을 끼친 책에 주어지는 이름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위대함은 우리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더 이상 위대함으로 남아 있지 않고, 우리의 상식이 되고 우리의 일상이 된다. 고전은 그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하지만 우리들을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고전이란 동시대인들과 동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시대에 있다고 해야 하겠다. 이 역설적 평범함이 고전의 한 기준이라면, 군주론은 고전의 기준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 책은 처음 출간되었을 때, 그리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세상을 경악시켰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불신, 도덕과 윤리에 대한 현저한 무시, 그리고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우리 현대이들에게도 여전히 놀랍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표방하는 현실주의 정치는 이미 우리 시대의 표준적인 정치 패러다임이 되었다. 정치가 더러운 것임은 결국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한 정치가 윤리와 도덕 위에 서기를 바라며 온갖 다툼을 한다. 마키아벨리의 입장은, 그렇게 되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비윤리적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기적 전망에서 비윤리적일 뿐 장기적 전망으로 보면 결국 윤리적인 것보다 더 윤리적이라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 이것은 심각한 주제이다. 그러나 아무튼 마키아벨리의 도발적 발언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무엇보다, 남몰래 마음속으로 그럴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 올의 거리낌도 없이 그렇게 퉁명스레 내뱉어 버리다니 말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불편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다. 요즘 같으면 이것도 적지않은 미덕이다.(옮긴이의 말 204, 205/255)




그간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 에서 다룬 책

1. 사피엔스

2. 징비록

3. 군주론

4. 멋진신세계

5. 신곡

6. 총.균.쇠

7.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8. 백범일지

9. 넛지

10. 이기적 유전자

11. 팩트풀니스

12. 데미안

13. 정의란 무엇인가

14. 코스모스

15. 서양미술사

16.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17. 침묵의 봄

18. 하멜표류기

19. 노동의 종말

20. 타인의 고통

21. 삼국지

22. 페스트

23. 햄릿

24. 호밀밭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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