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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Jan 11. 2024

소:담백#봄 04 소고기 듬뿍 넣은 미역국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네 번째 독백

Chapter 4. 소고기 듬뿍 넣은 미역국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밤낮없이 몰두하는 직장인 A 씨. 너무 일에 집중한 나머지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도 잊은 채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으로 큰 성과를 이룬 그녀는 회식도 마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옷도 갈아입지 앉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하루를 되돌아보던 그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올사람이 없는데…’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자,  “생일축하해!! “ 그녀의 눈앞에 케이크와 와인, 그리고 선물상자를 든 그녀의 친구들이 보였다. 자정이 다가오기 2시간 전이었다.  A 씨는 친구들의 성대한 축하를 받으며 그렇게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

생일도 잊을 만큼 바쁘게 일하는 직장인이라니…! 돌이켜보면 철없는 생각이지만,  십 대소녀의 마음에선 그 모습이 제법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당장 직장인이 될 수 없으니, 생일을 잊은 채 공부에 집중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깜짝 축하를 받는 학생이 되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생일이 속한 달이 시작되면 괜스레 달력을 힐끔 이게 되는 것이었다. 생일날이 될 때까지 마음속으로 디데이를 세보기도 하고, 생일 아침이 밝으면 동네방네 생일을 알리고 싶을 만큼 입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그러니 나에게 생일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생일은 한해를 기쁘게 살아가는 활력소였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Arrrrr”

요란스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고개는 이불속에 고정한 채, 한 손만 쑥 뻗어 더듬더듬 알람을 끄고 다시 잠에 들었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왜냐면 나의 열여덟 번째 생일날이었으니 말이다. 시끄럽기만 하던 알람소리마저 경쾌했고, 알람 한 번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등교준비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식탁으로 향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식탁 어디에도 미역국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구수한 된장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혹시 미역 불리는 시간이 부족해서 다른 국을 끓인 걸까? 된장국 한 숟가락을 목 뒤로 넘기며 엄마를 힐끔 보았다. 하지만 식사를 마친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출근 준비를 위해 부엌을 떠났다. 게다가 내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때까지 가족 중 누구도 생일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 모두 나의 생일을 잊었구나.


울적한 기분을 등에 업고 한껏 쳐진 모양새로 교실에 도착했다. 미역국을 먹지 못한 것뿐인데, 아니 가족들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못 들은 것뿐인데 온몸의 기운이 빠졌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괜스레 하품을 하며 책상 위에 엎드려 고개를 감췄다. 잠시 뒤 핸드폰을 꺼내 수신인에 엄마의 번호를 입력한 뒤 글자를 써 내려갔다.


‘엄마 나 오늘 생일인데… 혹시 잊었어?’

아니야. 이건 너무 진지하니까, 다시.


‘엄마 나 오늘생일이야! 까먹었나 봐 ㅠㅠ‘

이건 너무 장난 같은가. 내 속상함은 장난이 아닌데. 다시.


‘엄마 나 오늘 생일인 거 알아?’, ‘엄마 오늘 미역국 안 끓여줬어!’ 등.. 썼다 지웠다 반복하기를 수차례.

하지만 결국 문자 보내기를 포기하고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던져 넣었다. 이런 식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봤자 엄마의 마음만 하루종일 불편할 게 뻔했다. 이 정도의 속상함은 나 혼자 삭히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뒤늦게 나의 생일을 떠올린 가족들이 말을 걸어왔다.


‘잊어버릴 수도 있지 뭐.‘ 별일 아닌 척 쿨하게 대답했지만, 마음과 입술 간 합의가 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 거울 속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뾰로통한 나의 마음을 눈치챘던 걸까. 다음날 아침 식탁에 미역국이 올라왔다. 소고기가 푸짐하게 들어간 미역국이. 입꼬리가 씰룩였다. 안돼, 아직은 표정관리가 필요한데! 잔망스러운 입꼬리를 단도리하며 국물 한모금을 맛보자, 서운한 만큼 저만치 멀어졌던 입술이 조금, 아주 조오금 되돌아오는 듯했다.



우리 덕선이 생일 축하한다. 우미 그나저나 초가 열여덟 개여.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커브렀을까. 아빠 엄마가 미안허다. 잘 몰라서 그래. 첫째 딸은 워치게 갈치고, 둘째는 워치게 키우고 막둥이는 워치게 사람 맹글어야 될지 몰라서. 이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자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디. 긍께 우리 딸이 쪼까 봐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둘째 딸 덕선의 생일을 축하하며 덕선의 아버지가 건네는 말이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둘째 딸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잠시 잊었던 부모님을 99.9%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해소될 틈도 없이 퇴근하자마자 생때같은 자식들을 돌봐야 하는 부모님의 고된 하루. 그곳에 내 생일이 들어갈 틈이 없었을 뿐, 나의 생일을 깜빡 잊었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덜 사랑한다거나 덜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열여덟 사춘기 소녀의 자존심이 있으니 0.1%의 뒤끝은 마음속 깊고 깊은 작은 곳에 작은 굴을 판 뒤 몰래 담아두는 것으로..!)



나는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이 싫고, 옷이 나를 입는 건지 내가 옷을 입는 건지 알 수 없는 추운 겨울도 싫다. 또한 한낮과 저녁의 온도차에 어느 것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헷갈리는 가을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반면 봄은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 아닌가. 따스한 봄바람에 괜스레 마음이 간질거리고, 형형색색의 꽃과 달큼한 꽃향기로 오감이 깨어나는 계절. 아, 물론 내가 태어난 계절이 봄이라서 그런 것만은 절대, 절대로 아니다.


몇 달 뒤면 일 년 만에 봄이 온다. 그리고 나의 생일도 함께 온다. 올해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에게 미역국을 직접 끓여 대접할 것이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아낌없이 넣어 오랜 시간 뭉근하게 끓여낸 뜨끈한 미역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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