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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Feb 03. 2024

소:담백 #봄05 김밥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다섯 번째 독백

Chapter 5. 인생 김밥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 셋 중 누군가의 소풍날이 되면 우리 집 주방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아니, 소풍 전날 저녁부터 분주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엄마의 퇴근시간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고 집 앞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평소 좋아하던 과자와 음료수를 집어 들었고, 엄마는 김밥 재료들을 골라 담았다. 소풍을 가는 건 한 명이지만 김밥을 먹을 식구는 여럿이므로, 게맛살과 햄은 양이 많고 큼직한 것으로 골랐다. 이윽고 소풍 당일 아침. 엄마의 기상시간은 평소보다 앞당겨져 있었다. 김밥은 재료 손질부터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 만큼, 평소대로 일어났다간 출근준비 시간이 빠듯해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조금은 이른 소풍 준비가 시작되었다.


김밥 만들기는 전기밥솥에 쌀을 안치는 것부터 시작한다. 평소보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을 주걱으로 퍼올려 깊이가 깊은 그릇에 옮겨 담는다. 그리곤 약간의 깨소금과 참기름을 두어 바퀴 둘러 골고루 섞어준다. 밑간을 한 밥이 살짝 식을 동안에도 쉴 틈은 없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뒤 노란 계란 지단을 여러 장 구워낸 후, 세로로 길게 자른 햄과 채 썬 당근도 가볍게 볶아준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시금치는 물기를 쫙 뺀 뒤, 소금과 맛간장으로 맛을 더해 잠시 대기시킨다. 그 사이 굵은소금으로 겉면을 박박 닦아낸 오이는 무르기 쉬운 씨를 피해 길게 잘라준다. 새콤함을 더해줄 단무지도 빠질 수 없다. 이 역시 다른 재료들과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적당한 두께로 길게 잘라준다. 어느새 김밥의 90%가 완성되었다. 김발 위에 김밥용 김 한 장을 올리고, 적당히 식은 밥을 한 주걱 퍼올려 고르게 펴낸다. 그 위에 향긋함을 더해줄 깻잎 두장을 올리고 준비해 둔 속재료를 하나씩 올려준다. 그리고 김밥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속재료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양 손끝에 힘을 주어 한번에 말아 준다. 동그랗게 말아진 김밥을 한편에 치워둔 뒤 김발 위에 새로운 김을 올린다. 계란지단, 당근, 오이, 시금치… 속재료가 하나둘씩 바닥을 드러내면 어느새 김밥 말기가 끝이 난다. 잘 말아진 김밥 중에서도 가장 반들반들한 녀석을 집어 들어 도마 위에 올린다. 칼 아랫면과 김밥 윗면에 참기름을 슥슥 바른 뒤 김이 눌리지 않게 슬근슬근 썰어준다. 첫 꼬다리는 엄마의 옆자리를 지키던 아이의 몫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묻는다. “맛이 어때?”김밥을 오물거리던 아이는 말없이 엄지 손가락을 척 올린다. 두 번째 김밥부터는 단면이 잘 보이도록 도시락 통에 담아준다. 도시락 통이 빈틈없이 꽉 차면 화룡점정으로 깨를 솔솔솔 뿌려준다.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와 알록달록 외관까지, 한눈에 봐도 예쁜 김밥 도시락이 완성되었다. 엄마의 김밥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단연 인기 만점이었다. 하나만 바꿔 먹자며 여러 명이 달려들기도 했으니 이하 설명은 생략하겠다.




대학 시절을 회고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을 묻는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편의점 김밥’과 ‘컵라면‘이라고.

우리 학과 건물은 학교 후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학교 후문에서 강의실까지 가려면 족히 20분을 걸어야 했는데, 오전과 오후 수업이 연달아 있는 날이면 점심을 먹으러 후문까지 내려가려면 큰 결심이 필요했다. 자칫하다간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시키기도 전에 오후 강의시간에 쫓겨 돌아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날은 무조건 등교와 동시에 후문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매대 위에는 다양한 맛의 김밥과 삼각김밥이 늘 오와 열을 맞춰 서있었다. 점심메뉴는 편의점 김밥으로 정해졌지만 또다시 난제가 주어졌다. 삼각김밥을 먹을지, 일반김밥을 먹을지 그리고 어떤 맛을 먹을지, 1+1 상품을 고를지, 단품을 고를지. 선택지가 너무 많아도 문제였다. 빠른 결정을 위해 김밥과 함께 곁들여먹을 컵라면을 먼저 고르기로 한다. 이윽고 월드컵 결승전에 버금가는 치열한 경쟁 끝에 참치마요 김밥을 집어 들었다. 전날에는 전주비빔밥 맛의 삼각김밥을 먹었으니 이번엔 기다란 김밥이 좋을 듯했다.


“해당 이미지는 제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출된 것으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편의점 김밥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겉 포장지는 화려하지만 속내는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연출된 이미지만 보면 엄마의 김밥처럼 속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김밥 같지만, 막상 껍질을 벗겨보면 흰쌀밥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한 줄을 다 먹어갈 쯤엔 목이 턱 메이는 느낌에 국물 라면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또 언젠가는 졸업논문 때문에 온종일 실험실에 박혀 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의 점심을 내리 편의점 김밥만 먹었다. 분명 전날과 다른 맛의 김밥을 산 것 같은데 같은 맛이 느껴지는 건 왜인지……자취방으로 돌아와 점심에 먹다 남은 차가운 김밥을 입안에 욱여넣고 있자니 나의 어린 시절, 봄날의 김밥이 그리워지곤 했다.




직장인에게 야근은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내가 야근을 하며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아이러니하게도 ‘김밥’이다. 포장이 간단하기 때문에 밥을 먹으러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되며, 한입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에 하던 업무를 멈추지 않고 식사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땐 김밥은 나들이나 소풍을 갈 때 먹는 기분 좋은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간단히 끼니를 때울 때 먹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김밥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 소풍날의 추억과 설렘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널따란 잔디밭 위에 준비해 온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우리.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 뚜껑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퍼진다. 호기심 많은 어떤 아이는 본인 몫의 도시락을 먹다 말고 주변 친구들의 도시락 통을 기웃댄다. 그러다 “나 너희 집 김밥 하나만 먹어본다? “ 말하곤 젓가락을 분주히 움직인다. “아, 너도 우리 집 김밥 먹어봐도 돼! “ 생색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다 한 친구의 김밥이 꽤 입맛에 맞았던지 ”ㅇㅇ네 김밥 진짜 맛있어! “라고 외쳤다. 그 한마디에 ㅇㅇ이 도시락에 아이들이 시선이 집중되고 이내 “나도 먹어볼래!”, “나도 하나만!” 이라며 ㅇㅇ의 김밥 위에서 여러 개의 나무젓가락이 이리저리 교차한다. 김밥 속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도 이리저리 퍼져나갔다. 따스한 바람, 몽글몽글 일렁이는 아지랑이. 김밥을 먹으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고개를 젖히며 깔깔대던,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봄날의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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