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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Apr 06. 2024

소:담백 #여름04 오이냉국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아홉 번째 독백

Chapter 09. 오이냉국

먼저 소신 발언 하나 하겠다. 나는 오이가 싫다. 제대로 씹기도 전에 후각을 자극하는 오이 특유의 풋내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오이 비누에도 거부감이 들기 때문에,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셈이다. 하지만 김밥 속에 들어간 오이나, 비빔국수에 고명으로 올린 오이를 하나씩 골라내진 않는다. 아, 길게 자른 오이 스틱도 쌈장이나 고추장이 함께 한다면 문제없다. 이 정도면 오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안 되는 건가. 아- 그렇다면 다시 정정하겠다. 나는 오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못 먹는 것은 아니다. 풋내를 풍기는 날 것 그대로의 오이를 먹는 건 조금 힘들지만, 양념을 곁들인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어디선가 오이 헤이터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여름이 시작되고 집안 곳곳에 선풍기가 등장하면 시원한 얼음을 둥둥 띄운 오이냉국이 생각난다. 아이러니한가? 사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조금은 머쓱하다. 이럴 거면 서두의 첫 문장을 몽땅 들어내야 하는 게 아닌지.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그대로 남겨두기로 한다. 생오이를 싫어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서론이 길어졌다. 섭씨 30도가 넘어가는 바깥 기온에, 식사 시간에 맞춰 잠깐 사용하는 가스레인지의 열기가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여름. 여름이 시작되면 우리 집 식탁에는 오이냉국이 자주 출현한다. 오이냉국을 만드는 과정에 가스레인지가 필요 없으니 여름철 간단히 만들어 먹기 적당한 음식이다. 또한 한가득 만들어 둔다면 별다른 수고로움 없이  몇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 국을 끓이는 것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이냉국은 재료 준비부터 간단하다. 오이와 다진 마늘 그리고 국물의 감칠맛을 책임질 국간장과 소금, 매실청만 있다면 절반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 절반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흐르는 물에 거친 외관을 씻어낸 뒤 껍질을 벗겨낸 오이는 적당한 두께로 채 썰어준다. 그리고 채 썬 오이에 소금을 뿌려 잠시동안 오이에 간이 배어들도록 한다. 잠시 뒤 오이의 숨이 살짝 죽은 듯하면, 흘러나온 물을 흘려보낸 뒤 적당량의 생수를 채워 넣는다. 이어 다진 마늘 약간과 국간장, 소금, 매실청을 조금씩 넣어가며 간을 맞춰준다. 국물에서 의도하던 감칠맛이 느껴진다면 이제는 다 되었다. 색감을 살려줄 홍고추와 청양고추, 참깨 그리고 시원함을 더해줄 얼음 몇 조각을 올려준다.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시원한 오이냉국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10년도 더 된 일이다. 하루아침에 번듯한 서울 직장인에서 고시생이 된 나는, 1분 1초 공부에 몰두해도 모자랄 시기에 불행히도 공부보다 재밌는 것을 찾고 말았다. 왜 대부분 그러지 않는가. 시험기간에는 공부 빼고 모든 것이 재밌게 느껴지는 것 말이다.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당시 한창 유행하는 드라마도 아니요, 예능도 아니었다. 바로 ‘요리’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렸을 적 먹었던 집밥 요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본가에서 4시간 거리의 먼 타지에 살며, 식사시간이면 늘 집밥에 대한 향수가 함께 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열대야가 반복되던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오전 내내 수험서와 씨름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니,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오늘은 뭘 먹어야 하나. “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서 있다 보니 동네마트에서 사 왔던 오이 2개가 눈에 들어온다. 좋아하지도 않는 오이를 무슨 바람에서인지 사긴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장기간 방치된 상태였다. 오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문득, 여름이 되면  집에서 늘 먹던 오이냉국이 떠올랐다. 이번만큼은 좋아하는 미역을 추가해 보기로 한다. 곧장 핸드폰을 들어 검색포털에 ‘오이미역냉국 황금레시피’를 검색했다. 블로그에서 알려준 오이미역냉국 조리방법은 한눈에 보기에 무척 간단했다. 본격적인 조리에 앞서 말린 미역을 물에 불려 둔 뒤, 다시 레시피를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뭐야, 별거 아니네.”

레시피 정독을 마치고 나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사이 적당히 불어난 미역은 흐르는 물에 바락바락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다. 잘게 채 썬 오이와 미역을 보울에 옮겨 담은 뒤 생수를 채워 넣었다. 다진 마늘, 그리고 소금과 국간장을 넣고 휘휘 저은 뒤 국물 한 숟갈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거, 조금 이상하다. 소금과 국간장의 양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무엇 때문인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레시피를 한 줄씩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몇 번을 되새김질해 보아도 분명 다를 게 없는데, 실패의 원인을 도통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냐고 따져 묻고 싶어도 대답 없을 오이미역냉국을 한참 동안 쏘아보았다. 하지만 오후 공부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일단 다진 마늘은 제쳐두고 매실청과 소금 그리고 국간장 조금을 더 넣었다. 국간장 때문인지 국물 색이 아까보다 더 탁해졌다. 그래도 아까보단 나아졌겠지. 반신반의한 얼굴로 국물 한 모금을 맛보았다. 아니, 이 맛도 아니다. 고개를 저으며 소금과 국간장을 추가하길 여러 번. 포기하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이어갔으나 국물 색과 나의 얼굴색만 탁해져 갈 뿐이었다. 본가에서 먹던 냉국 맛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오이미역냉국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오후 공부시작시간이 임박한 탓에 밍밍한 오이미역냉국으로 대충 한 끼를 해결한 그날. 잠이 드는 순간까지 코끝에서 오이 풋내가 맴돌았다.


오이미역냉국을 실패했다는 사실이 몹시 분했던 나는,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실패요인을 알아냈다. 첫째, 채 썬 오이는 소금에 절여 간을 배게 해야 한다는 것. 둘째, 국간장을 많이 넣게 되면 국물 색이 탁해지게 되니, 간은 소금으로 맞춰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진정한 황금레시피를 알게 됐지만 그날 이후 내가 오이냉국을 만드는 일은 없었다. 원래도 오이에 우호적이지 않았으니 어려움을 자처하며 만들어 먹을 의지도 없는 것이다. 대신 시원한 오이냉국이 먹고 싶을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얼마 뒤 부모님 댁을 방문하면 얼음을 둥둥 띄운 시원한 오이냉국을 맛볼 수 있다.


부모님 집에 도착해 식탁에 앉자마자 오이냉국의 국물을 꿀떡꿀떡 삼킨다. 시원하고 짭짤한 그리고 청양고추를 넣어 얼큰하기까지 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간다. 윙윙 돌아가는 선풍기의 미풍과 시원한 오이냉국이 만나 뜨거운 날씨에 한껏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간다. 국물을 맛보았으니 다음은 오이를 건져 한입 크게 머금는다. 아직 밥은 한수저도 뜨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릇의 바닥이 보인다.


“잘 먹네. 한 그릇 더 줄게. 더 먹어. “

맞은편에 앉은 엄마는 식사를 하다 말고 내 앞의 빈 그릇-불과 몇 분 전까지 오이냉국이 담겨있던-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두 번째 오이냉국이 내 앞에 놓였다. 기분 탓일까? 왠지 아까 보다 양이 배로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렴 어떤가. 이 기세론 두 그릇, 세 그릇도 문제없을 듯하다.


식사를 마친 뒤 나의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엄마는 말없이 플라스틱 반찬통을 내게 내민다. 평소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딸에 대한 엄마의 걱정과 사랑을 오이냉국에 함께 담아 건넨다. 이 마음에 보답할 방법은 다음번에 깨끗하게 비워진 반찬통을 들고 오는 것이다. “엄마!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어!”라는 말도 잊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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