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열 번째 독백
“버들아, 이리 좀 와봐. “
방안을 깊게 파고드는 햇빛도 무시한 채, 이불속에 파묻혀 늘어지게 자고 싶은 주말 아침. 주방 한편에서 나를 찾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지만 못 들은 척, 아직 꿈속을 헤매는 척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가면 눈치 빠른 엄마는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양버들! 얼른 나와 보라니까. 엄마 좀 도와줘. “
나 혼자만의 소리 없는 눈치 싸움은 나의 백기투항으로 너무도 허무하게 끝이 난다. 엄마의 연속된 호출에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오늘은 또 무엇을 만드려고 내게 SOS를 치는 걸까.
방문을 열고 나가 주방을 바라보니 아침부터 분주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멀뚱히 서서 주말 늦잠을 방해받은 불만을 댓 발 튀어나온 입술로 표출하고 있는 나를 향해 엄마가 손짓한다.
“아 왜에,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에”
퉁퉁거리는 발걸음으로 엄마 옆에 다가서자, ‘해가 중천이다, 중천. 얼마나 더 잘래?’라며 엄마는 철없는 딸내미의 등짝을 내리친다. 그리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주걱을 내게 건넨다
.
“이것 좀 주걱으로 저어줘. 눌어붙지 않게, 알았지?”
주걱을 건네받은 나는 고개를 쑥 빼어 냄비를 확인한다. 냄비 안에는 연갈색의 물이 찰랑이고 있다. 냄비 옆에 놓인 도토리가루 봉지, 소금, 참기름 등으로 추측해 보건대 오늘의 메뉴는 ‘도토리묵’ 일 것이다. 오늘도 쉽지 않겠군- 생각하며 가스레인지 레버를 돌려 불을 점화한다.
엄마는 예전부터 집에서 도토리묵을 쑤곤 했다. 그래서 엄마의 주방에는 도토리가루가 늘 상비되어 있다. 집에서 도토리묵을 만든다는 것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5분 만에 뚝딱 완성되는 라면처럼 간단하지도 않으며, 앞서 소개한 오이냉국처럼 불이 필요 없는 요리도 아니다. 심지어 5분 거리의 마트에만 가도 잘 포장된 도토리묵을 팔고 있는데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란 말인가. 볼멘소리가 튀어나오면 엄마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 시판용과는 엄연히 맛이 다르다.’고.
엄마의 말마따나 시판용과 다른, 정성이 가득한 도토리묵을 만들려면 먼저 도토리가루와 물이 필요하다. 두 가지 재료를 냄비에 넣은 뒤 적정한 비율(1:5 또는 1:6)로 섞어 준다. 감칠맛을 위해 약간의 소금도 넣어준다. 이때 도토리가루가 뭉치지 않게 곱게 풀어주어야 한다. 가루가 고르게 풀어진 듯하면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뒤 레버를 최대치로 돌려준다. 냄비 전체에 열기가 퍼지기 시작하면 주걱을 사용해 한 방향으로 저어준다. 이때, 냄비 바닥을 긁어내듯 훑어가며 저어주는 것이 중요한다. 자칫하다간 탄맛 나는 도토리묵을 만날 수도 있다.
두 눈은 냄비에, 입은 엄마와의 수다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걱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한다. 찰랑이던 반죽이 졸아들어 꾸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점차 점도가 강해지는 반죽을 한 손으로 다음엔 양손으로 저어주기를 여러 번. 주걱을 쥔 팔에 뻐근함이 느껴질 쯤이면 반죽의 색도 제법 짙어져 있다. 이때 가스레인지 불을 약하게 줄여주어야 한다. 얼마 뒤 뜨거워진 반죽 위로 여러 개의 기포가 산발적으로 올라왔다 터지기를 반복한다. 기포가 터지며 뜨거운 반죽이 튀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므로 고무장갑을 미리 착용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적당한 점도가 되었다 생각되면 가스레인지 불을 완전히 끄고 들기름 몇 방울을 떨어 트려 준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것이 도토리묵의 완성은 아니다. 흔히 볼 수있는 사각형의 도토리묵을 만들기 위해선 잠시동안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직사각형의 유리그릇이나 틀을 준비한 뒤 사면에 고루 기름칠을 해준다. 곧이어 반죽을 틀에 옮겨 담아 평평하게 펴낸 뒤 서늘한 곳에서 식혀준다. 시간이 흐른뒤 적당히 굳은 도토리묵을 틀에서 분리한다. 미리 발라둔 기름 덕분인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쏙 빠진다. 탱탱하고 윤기가 자르르한 도토리묵은 한 끼 먹을 만큼만 덜어내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준다.(한 번에 모두 잘라 냉장고에 넣게 되면 도토리묵이 마르며 딱딱해지기 때문에 식감이 좋지 않다) 이때 물결모양의 칼을 사용하면, 약 0.5%의 멋도 가미할 수 있다.
보기 좋게 자른 도토리묵은 간장 양념과 함께 곁들여 먹거나, 상추와 양파 등과 함께 도토리묵무침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실외온도가 30도가 웃도는 여름 날씨에는 양념한 신김치, 채 썬 오이, 김가루, 통깨, 그리고 살얼음이 낀 냉면육수를 부어 먹는 냉묵사발이 별미이다. 선풍기 바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무더위도, 이가 시릴정도의 시원한 냉묵사발 한입에 기세를 한수 접을 정도이다. 때문에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있어 냉묵사발은 여름이 가기 전 무조건 한 번은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으니 나의 연약한 위장에도 부담이 없다. 이런 나의 패턴을 알고 있는 엄마는 도토리묵을 쑤고 나면, 냉묵사발 만들 만큼의 도토리묵을 내 몫으로 챙겨주곤 한다.
무더운 여름날, 도토리묵을 쑤기 위해 가스레인지 앞에서 쉼 없이 반죽을 저어야 하는 일은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토리묵 한입은 노고가 잊힐 만큼 맛이 있다. 물론 온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인 만큼 며칠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몇 끼 동안 식구들의 입이 즐거웠다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