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 May 26. 2024

소:담백 #가을 02 비빔밥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열두 번째 독백

Chapter 12. 비빔밥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전교생이 점심 도시락을 챙겨 다녔다. 아, 오해는 하지 말길. 급식소가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건 아니니. 주변 학교 중에서 우리 학교만 급식소가 없었을 뿐이다. 즉, 내 나이가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니란 뜻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교내에 급식소가 없었던 탓에 나는 3년 내내 책가방과 함께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깜빡하고 도시락을 두고 온 날은 매점에서 해결해야 했으니, 등교 전 도시락 존재를 확인하는 건 필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도시락은 여간 귀찮은 존재였다. 아니 사실 그렇다 해도 늘 성가시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도시락 덕분에 중학교 추억이 풍부해졌으니까.


점심시간을 알리는 타종이 울리자 교실 안이 부산스러워진다. 너나 할 거 없이 도시락 가방을 꺼내어 삼삼오오 모여든다. 도란도란 얘기하며 먹기 좋게 책상 방향을 바꾸는 것도 잊지 않는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각양각색의 반찬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낸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겼기에 어느 하나 우열을 가릴 순 없다. 하지만 한창 가공식품을 좋아할 나이였기에 비엔나소시지나 고기반찬에 눈길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을 나누지 않고 반찬을 공유하며 먹다 보면 어느새 도시락통이 텅 빈다. 아쉬운 마음에 밥알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는다. 그러다 누군가 꺼낸 ‘매점’이란 단어에 아이들의 눈빛이 동시에 반짝인다. 밥은 밥이고 과자는 과자니 문제 될 건 없다.


또 어느 날은 우리끼리의 날-일명 비빔밥의 날-을 만든다. 비빔밥의 날이라 해서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친구가 양푼이 그릇을 가져오기로 하고, 또 다른 친구는 참기름과 고추장, 계란프라이를 가져오기로 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넉넉한 양의 밥과, 비벼먹기 좋은 반찬을 싸 오면 된다. 도시락의 날 당일, 점심 타종이 울리고 평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양푼이 그릇이 책상 위에 올라오자, 도시락통을 들고 한 명씩 차례대로 밥과 반찬을 쏟아붓는다. 마지막으로 고추장 한 숟갈을 듬뿍 떠내어 양푼이 그릇 모서리에 탕탕 내리친다. 자, 재료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숟가락을 들고 신명 나게 비벼주면 끝이다. 말갛던 쌀밥이 붉게 물들어간다. 보기만 해도 매콤한 색이 구미를 당긴다. 모든 재료가 적당히 섞였다면 참기름 두어 바퀴를 휘휘 둘러 마무리해 준다. 아차차, 머릿수 대로 준비한 계란프라이까지 올려야 진짜 완성이다.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올라오자 이성을 잃은 청춘들이 양푼이 그릇 앞으로 앞다투어 몰린다. 숟가락이 몇 번 오가지 않은 것 같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양푼이 그릇의 바닥이 보인다. 다음 비빔밥의 날에는 밥 양을 더 늘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 비빔밥의 날이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벤트 같은 것이라면 우리 집에서는 흔하디 흔한 메뉴였다. 사실 소:담백 가을편의 소재로 비빔밥을 선택한 이유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장 봐둔 것들이 뚝 떨어졌다거나, 냉장고 안에 먹을 반찬이 없을 때면 할머니는 늘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아이, 밥 비벼줄 끄나?”

학교에서 먹던 비빔밥의 핵심 포인트가 양푼이 그릇이었다면, 집에서 먹던 비빔밥은 스텐 냄비가 포인트이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린 뒤 냄비가 적당히 달아오르면 기름을 붓는다. 그리고 냉장고를 지키던 반찬들을 꺼내어 냄비로 옮겨 담는다. 콩나물무침, 고사리무침, 도라지나물, 멸치볶음, 깍두기까지. 그리고 씻어둔 상추는 손으로 대충 북북 찢어 올린다. 중간정도의 가스불에서 반찬들을 볶아 준 다음, 큼지막하게 퍼올린 쌀밥을 옮겨 담아준다. 쌀밥과 모든 반찬이 한데 모였다면 마지막으로 고추장 한 숟갈을 넣고 꼼꼼히 비벼준다.


“아나, 간 좀 봐라 “


옆자리를 지키고 선 손주의 입안에 비빔밥 한 숟갈을 넣어주면, 입안 가득 퍼지는 뜨거운 열기에 삼키지도 못하고 눈을 껌뻑이며 허-  허- 하고  공기 가득한 숨을 뱉어낸다. 하지만 이내 느껴지는 익숙한 맛에 엄지 손가락을 척 편다.


“간이 딱 맞아, 맛있어 할머니!”


손주의 오케이 사인에 할머니는 가스불을 끈 뒤 참기름을 몇 바퀴 두른 뒤 계란프라이를 올려준다. 곧이어 식탁 위에 냄비채로 비빔밥이 올라온다. 그 옆엔 두부 된장국과 구운 김이 자리를 지킨다. 할머니표 비빔밥에는 짭짤한 조미김보다는 가스불에 스치듯 구운 김이 잘 어울린다. 비빔밥을 품은 구운 김이 입천장에 척-하고 달라붙으면 두부 된장국 한 모금을 마신다. 김이 맥없이 떨어짐과 동시에 살짝 막혔던 목도 뚫리는 듯하다. 한참을 먹다 보면 더 이상 긁어모을 쌀알이 없을 때가 오는데, 그때부턴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밥이 별미이다. 눌은밥까지 먹어야 할머니의 비빔밥을 다 먹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입 짧은 형제들 덕분에 눌은밥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부모님 댁에 가면 여전히 할머니가 쓰던 스텐 냄비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똑같은 냄비에 똑같은 반찬을 넣고 비벼도, 그 옛날 할머니의 비빔밥 맛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내 입맛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할머니의 손맛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담백 #가을 01 상추튀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