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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04. 2019

문명사회, 무너지다

영화 <주토피아> 리뷰


<주토피아>. 극장 상영 중일 때 타이밍 놓쳐 못 본 걸 이제야 봤다. 기본적으로 나는 동화를 좋아한다. 그러니 주토피아 같은 동화를 싫어할 리 없다. 재밌게 봤다. 세계관이 잘 구축돼 있어서 좋았다. 아직 이야기의 중심으로 제시되지 않은 세계들이 많아 보이는데, 후속작이 얼른 나와주길 바란다. 뒤로 스포일러 있지만, 나온 지 햇수로 3년 된 영화에도 스포일러 방지를 하는 게 맞는진 잘 모르겠음.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것 같다. 상호 편견 갖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오히려 현실과의 유비 속에서 해석하려 하면 더욱 복잡해지는 감이 없지 않다. 예컨대 진짜 악당이 초식동물인 양이었다는 점이나, 현실에서 (사회, 문화적 의미에서의) 약자가 절대 다수를 이루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과의 유비는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현실의 유비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겠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 역시 (아주 최신적인 의미에서) '문명사회'의 성립조건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모두가 '생물학적'으로 평등해지긴 어렵지만, 그래도 서로가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문명사회일 테다. 문명사회는 단지 잘 구축된 제도만으로 유지되기 어렵고,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배려와 존중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를 주토피아는 들려준다. 물론 특히나 '강자'들의 배려가 중요하다. 그들은 약자를 잡아먹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문명사회가 무너지게 되는 방식의 묘사인데, '공포 통치'의 목적으로 원래 맹수였던 동물들의 문명성을 마취시켜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주토피아가 제작되던 시점을 고려하면 제법 예언적인 이야기다. 제작되던 시기는 2015년 즈음이고 개봉한 시기는 2016년 초반,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대선의 이전 시기다. '이성적인 리버럴'들이 잘 구축해둔 문명세계를, '야만적인 정치인'들이 '원래 기득권이었던 백인 남성들의 분노를 선동'해 문명 이전(즉 소수자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세계)으로 되돌리려 한다는 위험성에 대한 경계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의 리버럴은 그렇게 무너졌고, 미국의 소수자들이 위협받는 세계가 됐다.


물론 그 '백인 남성'들과 상호 배려하며 공존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은 것도 이것이 트럼프 당선 이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결국 미국이 '문명' 이전으로 돌아간 것은 선동하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동되기를 택한 백인 남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선가, 트럼프 이후 헐리우드는 더 이상 상호 배려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인 것도 맞고. 뭐, 잘은 모르겠지만.


디즈니답게(?) 찝찝한 대목들도 많다. 예컨대 '주디 홉스'는 "큰 일은 여자가 한다"거나 "야망 있는 여자"라거나 뭐 그런 슬로건을 상징하는 것 같은데, 실제 현실에서 종종 그렇듯 이 '야망'에 대한 지지는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는 것'에 대한 하대로 나타나게 된다. 주디의 경우는 "진짜 경찰(야망)"과 "홍당무 농사", "주차 관리원"의 대비로 표현된다. 물론 현실에서 직업들에는 명백히 귀천이 존재하고, 사회적으로 '귀하다'고 여겨지는 직업은 남성들의 것으로 전유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직업의 귀천을 승인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굳이 실제로 존재하는 직업들을 예로 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고 노래하면서도 결국 '홍당무 장사'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 갇힌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고, '주차 관리원'은 무능력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묘사하는 리버럴-엘리트의 모순. 그치만 뭐, 동화니까.


-

덧붙임.


1.

이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서사가 휙 달라지는데, 그 분기를 들자면 닉이 주디에게 피해감을 호소하는 지점일 것이다. 현실과의 유비로 서사를 해석하면 초식동물이 차별의 대상인 전반부는 비교적 깔끔하게 유비되지만, 육식동물이 차별감을 호소하고 초식동물이 갑자기 악당으로 드러나는 후반부는 어쩐지 어떤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지 이해가 어렵다.


그런데 오늘 문득 악당인 벨웨더가 한 "육식동물은 10%밖에 안 되지만 초식동물은 90%를 차지한다"는 대사를 다시 곱씹었더니 조금 이해가 됐다. 나로서는 그 대사가 굉장히 불필요하게 디테일하고 맥락없이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는데, 10대90이라는 도식은 반자본주의 투쟁의 구호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몇 년 전 있었던 '월가 점령 시위'에서 대표적으로 그런 구호가 있었다. 물론 그때는 '1대99'였지만, '10대90'이라는 구호는 본질적으로 '1대99'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전반부까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종의 유비였다면, 후반부의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은 부자와 빈자의 유비로 읽힌다. 디즈니는 미국, 아니 세계에서 명백히 '부자'의 위치에 놓인다. 그들의 입장에서 월가 시위는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운동이었고, 그 위협의 주체는 90%의 빈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토피아 후반부의 이상한 역전은 월가 이후 미국 자본주의자들의 위기감이나 억울한 Kibun 뭐 그런 게 투영된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2.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이든 될 수 없는 것은 단지 인식적 차원에서 차별받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내가 어떤 전문가가 될 수 없는 건 단지 성별이나 인종 같은 선천적인 이유가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된 배움의 기회, 재능, 뭐 그런 사회적, 개인적인 것들 때문이라는 얘기.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는 구호에 감화받는 집단은 결국 후자의 이유들에서 어떤 결격사유도 없는 극히 소수의 계층들뿐 아닌가. 그리고 디즈니가 그런 점을 간과한 배경이 있다면 그건 다시 1번의 이야기로. 그들이 바로 극히 소수의 계층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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