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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04. 2019

"인터랙티브는 가능한가?"에 대한 블랙미러의 대답

영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리뷰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넷플릭스. 이 끔찍한 변태들이 또 끔찍한 변태물을 하나 만들어내버렸다. 오해할까 덧붙이는데, 이건 찬사다. 아래 단락에 스포일러 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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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인터랙티브 드라마'의 장을 열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리즈가 '블랙미러'라고 하니 확 느낌이 왔는데,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아니, '역시나'라고 생각했을 때의 수준 이상으로 변태적이었다. 아우, 진짜 역겨운 새끼들. 하지만 끝까지 보고 박수치는 것이 블랙미러 시리즈다.



인터랙티브라는 형식은 주로 비디오 게임에서 활용돼 온 걸로 알고 있다. 게임에서 그 형식이 활용될 때 어떤 장치로 활용되는지는 게임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밴더스내치>는 형식 자체를 하나의 서사로 통합시켜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알기로 <스펙옵스: 더 라인>이라는 게임이 활용한 방식(유튜브에서 봄;;)과 유사하게 인터랙티브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 메타-형식(?)이라고 해야 하나.


주인공은 극 중반부터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명령하고 있다"고 얘기하게 되는데, 그 명령의 예시들은 전부 우리-시청자가 직접 선택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 명령의 예시들이라는 것은 하나 같이 주인공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들이다. 게임을 망치거나, 인생을 망치거나. 온갖 분기를 선택해봐도 결말은 저 둘 중 하나다. 그러니까 '시청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형식은 주인공의 파멸을 유도하여 비윤리성에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그야말로 블랙미러의 핵심 주제 그 자체다. 정말 영리하지 않나? (그런데 말이다. 21세기의 인간은 이걸 "흥미롭다"고 하지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스터 에그인지 뭔지, 중간에 주인공에게 신호를 보낼 수도 있는데, 여기서의 선택지 중 하나가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로 널 보고 있어,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이야." 아, 진짜 상변태들.


특히 영리하다고 생각한 장면은 과거 회상씬. 여기서도 선택을 하게 하는데, 선택지는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일 테다. 실제로 선택지 이후의 현재 시점에서도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선택을 시켰을까? 그 과거의 선택이 주인공이 품어온 파멸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선택을 하게 함으로써 시청자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은 정말이지 블랙미러적인 고약함이다.


"드라마라는 장르에 인터랙티브라는 형식이 정말로 필요하고 적절한가?" 내가 시청에 앞서 품은 의문인데, 결과적으로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는 이 의문에 아주 유효한 답변을 남겨준 작품이 됐다. 이 이야기를 블랙미러의 주제의식 하에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이 바로 인터랙티브다. 다만 이렇게 활용되는 것이 아닌 한에야 인터랙티브라는 형식이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밴더스내치> 외의 예시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보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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