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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01. 2017

구두를 팔아요

근데 브런치에 이런 거 올려도 되나 스토리니까 괜찮겠지 용서해주세요

영화 <킹스맨> 보셨나요? 누군가는 이 영화를 '해리'의 영화로 기억하겠지만, 누군가는 '에그시'의 영화로 기억할 겁니다. 해리의 영화로 기억하는 사람은 어쩌면 <킹스맨>을 단순히 스타일리시한 액션영화로 기억할 테지만, 에그시의 영화로 기억하는 사람은 그보다는 한 철부지 소년의 성장서사로 기억할 거예요. 재능은 넘치지만 딱히 꿈은 없는 한 소년의 성장서사.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나온 양복점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해리가 마침내 요원이 된 에그시를 처음 데려간 곳이 바로 '킹스맨' 양복점이죠. 여기서 해리는 에그시에게 온갖 비밀무기를 탑재한 손목시계와 안경과 양복 등을 자기 취향껏 고르게 합니다. 딱 하나 직접 골라준 것이 바로 구두였어요. 


"구두는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가 최고야." 


에그시가 요원의 세계를 알게 한 바로 그 비밀의 단어. 



왜 해리는 구두만은 직접 골라준 걸까요? 그건 어쩌면, 아이들도 쉽게 차이를 구분해낼 수 있는 정장과 달리, 한 눈에 보기엔 별 차이도 없어보이지만 작은 디테일로 승부를 보는 게 구두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시 말해 구두는 그 작은 디테일로 패션을 완성시키는, 패션의 마스터피스, 화룡점정인 것이죠. 이 구두를 직접 골라준다는 것. 그건 일종의 성인식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네가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로 내가 이 구두를 선물할게.' 


맞습니다. 어른의 징표, 그게 구두입니다.


자, <킹스맨>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올 3월로 돌아가볼까요. 아직은 찬 바람이 불던 3월 초봄(春), 이춘희(李春熙)는 여느날처럼 페이스북에 접속합니다. 이런, 지구본에 알림이 많이 달려있진 않군요. 그런데 눈에 띄는 알림이 하나 보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어느 게시물에 태그했어요. '패션고자 구제 이벤트', 의류업체 스트라입스에서 <ㅍㅍㅅㅅ>와 함께 실시한 마케팅이라고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정말 옷을 못 입는 친구를 태그하면 추첨을 통해 스트라입스에서 정장을 맞춰주고 화보를 찍어준다는 이벤트. 자기 정도면 잘은 아니어도 적당히는 입는다고 믿었던 춘희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결국 그는 이벤트에 당첨(!)돼버립니다.


정장이라곤 입어본 적이 없는데 정장을 맞춰준다니. 당황스럽습니다. 게다가 옷만 맞춰주고, 구두는 안 맞춰준다네요. 이런. 춘희는 신발가게에 들어가 적당한 구두를 삽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브로그 없는' 구두를 샀네요. 그렇게 스물여덟 춘희는 얼떨결에 어른이 됐습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 구두가 어른을 만드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영 발에 맞진 않습니다. 자기 발보다 작은 사이즈를 사버린 것이죠. 깨달았을 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화보촬영날이 바로 내일로 다가온 것이죠. 어쩔 수 없이 이 구두를 들고 화보촬영장에 갑니다.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아직 봄이라 자신감은 넘칩니다. 정장을 입고, 수줍게 구두를 신어봅니다. 오, 제법 태가 납니다. 구두를 신고 폴짝 뛰는 사진도 찍어보고, 응모할 때 도용(?)된 사진과 같은 포즈를 취해도 봅니다. 


춘희가 이 구두를 다시 신은 건 어느 언론사 면접날이었습니다. 다시 정장을 꺼내입고, 아무래도 발에 맞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구두를 맞춰 신어 면접을 보러 갔지만, 아뿔싸, 떨어져버렸네요. 빌어먹을 청년실업. 이건 구두가 발에 안 맞았던 탓이야. 그 이후로 그는 어떤 언론사 시험에서도 면접에 가지 못했고(...) 결국 이 구두는 두 번만 신은 채 신발장을 향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끝나갑니다. 이제 더 남은 언론사 공채도 없지요. 내년에는 발에 맞는 구두를 사기로 합니다. 그렇다면 언론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지요. 좋은 기자가 되어라, 춘희.


그런데, 이 구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잘못 산 셈 치고 짱박아두기엔 어딘가 아깝습니다. 꽤 예쁜 구두인걸요. 사진도 찍혀보고, 면접도 봐 본 귀한 경험을 한 구두인걸요. 그래서 이 구두를 팝니다. 스테파노로시 에스-팁 구두 41(255~260)입니다. 춘희는 나이키 운동화 사이즈 275를 신으니, 나이키 기준 265~270을 신으시는 분이라면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저렴하게 가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격 협상은 메시지를 주시면 소유주와 연결시켜드리지요... 구두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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