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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01. 2017

워커를 팔았어요

벌써 5년 하고도 8개월 전의 일이다. 지금은 사라진 의정부 306 보충대에서 소위 '보급물자'를 지급받은 게 말이다. 영 몸에 맞지 않는 전투복을 지급받고, 260 사이즈의 전투화를 지급받아 생활관에 걸터 앉았다. 발밑에 놓인 전투화를 빤히 노려봤다. 태어나서 이렇게 무거운 신발은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생긴 신발을 신으라고 하는 거지?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은 훈련병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 일단 발을 집어넣어 봤다. 오마이갓. 이렇게 불편할 수가. 내 발이 내 발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신을 수밖에. 


그렇게 1년 9개월을 신었다. 매일 아침이면 그 신발을 신고 구보를 뛰었고, 정기훈련 때면 그 신발을 신고 수십킬로미터를 행군했다. 휴가의 시작은 전투화를 벗어 던지는 것이었고, 휴가의 끝은 전투화를 도로 신는 것이었다. 전역한 날, 뛸 듯이 집으로 달려온 나는 전투화를 벗어던지고 신발장에 처박았다. 이로써 해방이라고. 두 번 다시 저딴 신발 신지 않겠노라고. 다시 말해 내 발을 조이는 저 전투화는 내 몸을 구속하는 군생활의 유비였다. 


봄에 입대해 겨울에 전역했다. 2013년 1월이었다. 위도로 따지자면 부대가 있던 곳에 비해 그리 낮은 곳도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일산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가벼운 운동화를 사서 그해 겨울을 내내 보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겨울. 다시 신발을 사러 모 신발가게에 들어섰다. 코트와 어울리는 신발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목 높은 신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의, 딱딱해 보이는, 워커. 견고하게 발을 착 감쌀 것처럼 보이는, 워커. 왜 그게 그렇게 눈에 들어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저게 얼마나 불편한지 1년 9개월 동안 몸으로 배웠으면서! 또 다시 저런 신발을 내 발에 감기려고 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때로 인간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행동을 감행하는 법이다. 어느새 손엔 워커가 들려 있었고, 내 얼굴엔 만족한 웃음이 가득했으리라. 


그렇게 업어온 워커. 지난 겨울의 그 고통스러운 기억은 마치 조작된 것인 마냥, 워커의 착용감에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스톡홀름 증후군이 이런 걸까. 나는 자유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그런 보수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그렇게 자괴하기에 신발은 너무 예뻤고, 따뜻했다. 그러고보면 꽤 추운 겨울이었다. 안녕들을 하면서 야외에서 집회를 하는 일도 잦았다. 그때마다 기꺼이 워커를 신었다. 큰 훈련을 앞두고 전투화 끈을 단단히 조이던 그때의 나처럼, 거리에 나서며 워커 끈을 조이면 왠지 전투의지도 생기고 막 그랬다. 어느새 나는 찬 공기가 뺨을 감싸면 신발장을 열어 워커부터 꺼내고 보는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겨울이 오는 소리는 워커가 땅을 박차는 소리와 같았다. 그해 겨울, 그리고 이듬해, 또 다음해 겨울 내내 워커를 신고 다녔다. 추위와 맞서기 위해, 또 세상과 맞서기 위해 워커는 필수적이었다. 


그렇게 신다보니, 내 마음처럼, 워커도 쉽게 해지고 말았다. 굽이 닳아 무릎에 압박을 줬다. 딱 봐도 낡아보였는지, 엄마는 워커를 내다버렸다. 이번 다가오는 겨울에 신발장을 열었을 때 그곳에 워커는 없었다. 나는 그새 애인도 생겼는데! 예쁜 코트를 입으려면 워커를 신어야 하는데! 워커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새 워커를 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레스모어에 신발을 사러 갔다는 것이다. 급히 레스모어 홈페이지에 들어가 예뻐 보이는 워커를 골랐다. 내 것도 사다달라고 보챘다. 내 사이즈가 평소 260이니, 이것도 260을 신으면 되겠지. 


그렇게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빨리 코트를 입고 싶었으니까. 형, 260으로, 이 모델, 사다줘. 그렇게 사온 워커는... 내 발엔 조금 컸다. 그치만 신발을 사온 다음날, 조카의 돌잔치가 있었던 것이다. 코트를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곳. 어쩔 수 없이 그 워커를 신고 갔다와야 했다. 일생의 실수였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발에 맞지 않는 탓에 내내 아팠고, 집에 돌아와서야 이 신발을 환불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장 내일 종말이 오면 비상식량으로 먹을 수야 있겠지만, 그럴 일이 없어보이니 신발장에 두어봐야 데코레이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중고로라도 팔아야 한다. 그래서 쓰는 글이다. 여러분, 워커는 최고입니다. 로버스의 BRAVA H고요. 레스모어에서 8만원에 팔고 있습니다. 딱 한 번 신었는데, 발에 안 맞아 끌고다닌 탓에 약간 사용흔적이 남아있긴 합니다. 싸게 해줄게요. 사실 분은 메시지 주시면 가격을 협의해봅시다. 신발 예쁩니다. 발에 맞지 않을 뿐이지... 


는 팔았다. 스토리텔링 최고네요. 

그냥 워커에 대한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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