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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01. 2017

포스트 트루스, 페이크 뉴스, 확증편향, 냉소주의.

누군가 박사모 카페에 "BBC가 촛불집회를 비판했다"는 제목을 달고 영어 노래가사를 올렸다. 댓글들이 달렸는데, "역시 외국도 알고 있다"는 식이다. 며칠 전부터 페이스북에서 계속 보이는 게시물이다. '영어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박근혜만 따르는 할배들'이라는 비웃음이 뒤따랐다. 박사모 회원들이 영어도 모르는지 아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마 저들은 "비판했다"는 제목만 읽었을 것이다. 이들의 사고의 중심엔 오직 '나의 입장'이 있고, 그것을 확신시켜주는 것은 진실, 그것과 대치되는 것은 조작이다.


물어볼 일이다. 우리는 저들과 다른가? 언제부턴가 뉴스는 제목장사가 됐다. 언론이 이익만 챙겨서? 맞다. 근데 그것이 왜 이익이 될까? 독자들은 제목만 읽으니까. 페이스북을 보면 이런 경우가 흔하다. 충격적인 사실을 제목으로 내건 뉴스가 떠다닌다. 포스팅한 사람은 이 사실에 분노해 오만 욕을 쏟아낸다. 댓글들에도 분노가 일렁거린다. 기사를 클릭해보면 다음과 같은 경우일 때가 많다. 옛날 뉴스거나, 아무런 근거가 없거나, 전혀 다른 내용이거나, 제목과는 달리 평범한 내용이거나. 우리가 제목만 읽거나, 아니면 내용을 대강 쓱 훑고서는 그 뉴스를 읽었다고 믿는 일은 요즘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언제 내용을 읽을까? 제목이 담고 있는 내용이 나의 입장과 배치될 때다. 그것이 나의 입장과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해내기 위해 비로소 기사를 꼼꼼하게 읽는다. 여기엔 진실에 대한 갈구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유사전쟁 심리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나와 너의 전쟁이고, 진실은 오직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만 유용할 뿐이다. 전쟁에 도움되는 사실관계는 달리 검증하지 않으며, 도움되지 않는 사실관계를 마주할 때만 온 노력을 기울여 검증한다. 그러니 우리가 박사모와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박사모를 조롱하는 일은 쉽다. 지금 당장의 전쟁을 이기는 데는 조롱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어려운 건 내가 그들과 같지 않기 위해 성찰하는 일이다. 더 이상 아무도 성찰하지 않는다. 성찰의 가능성을 믿지도 않는다. 승전에 희희락락하는 사이에 세상은 점차 불행해지고 있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멍청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게 됐다. 그렇게 말한다고 세상이 불행해지는 걸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 대부분이 똑같이 멍청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게 됐는가를 고민해볼 뿐이다. 뭔가 더 쓸 말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므로 여기서 줄인다...


PS. 그리고 요즘 정말로 고민하는 부분은, 이런 확증편향의 결과물임이 뻔히 보일지라도 그게 나의 입장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일단 승인'해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와 입장이 같지만 그 과정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 더욱 힘을 쏟고 있다. 그치만 비판했다는 이유로 입장이 '틀린' 사람이 돼버리고 마니 이것 참 고약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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