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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22. 2017

웨스트윙, 하오카, 지정생존자.

'진정성'을 키워드로 미국 정치드라마 흐름 꿰기

1.

웨스트윙을 뒤늦게 시작해 이제 막 시즌4까지 봤고, 하우스 오브 카드는 시즌5 티저를 띄웠으며, 지정생존자 휴방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시점이다. 이 세 드라마는 미국의 정치드라마라는 공통점이 있고, 대통령과 참모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면서도 이게 정말 같은 장르의 드라마인가 싶을 정도로 정치에 대한 관점이 판이하게 달라 흥미롭다. 조금 무리하게 가설을 세우면 (이게 맞다면 참 좋은 평론일 텐데) 그 차이는 시대가 흘러오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큰스승님의 『냉소사회』의 권위를 빌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런 것이다.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모든 것은 진정성 있다"에서 시작해 그 반작용으로 "진정한 무엇은 없다"로, 다시 그 반작용으로 "진정한 무엇은 있다"로 옮겨왔다는 얘기다. (참고)


2.

먼저 웨스트윙.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된, 세 작품 가운데 가장 선배 작품이다. 미국 정부로 구분하자면 민주당 빌 클린턴의 시대부터 조지 W 부시의 시대까지. 이 시리즈에서 미국은 아주 이상적인 무엇처럼 보인다. 물론 영민한 각본가 아론 소킨은 이상을 그리는 와중에도 미국의 위선이나 한계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다. 여기에 나오는 정치인들은 저마다의 사상을 가지고,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의 의사를 대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때로는 같은 민주당 소속이면서 백악관의 정책에 반대표를 던지는 민주당 의원들이 악역 비슷하게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권력 암투라기보다는 각자가 대표하는 유권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웨스트윙에서는 역설적으로 '진정성'이 정치의 중요한 척도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진정성 있기 때문이다. 정치란 원래 진정성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정치인은 존중받을 만하다는 게 이 드라마가 말하는 정치의 모습이다. 이 글을 읽는 2017년의 사람이라면 코웃음칠 수밖엔 없을 게다. 그런 정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면서. 물론 나도 그렇다. 하지만 웨스트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좋은 정치 드라마다. 이 글에서는 사족일 수 있지만, 아론 소킨은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정치 형태를 다 보여주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웨스트윙을 쓴 것 같을 정도다.


3.

그 다음엔 하우스 오브 카드. 2013년부터 지금까지 네 시즌을 방영했고 다섯 번째 시즌을 앞두고 있다. 미국 정부로 구분하면 오바마의 시대에 시작해 트럼프의 시대로 향해가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정치는 아주 추잡하고 음모적인 것이다. 주인공인 프랭크 언더우드는 오직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만을 원한다.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라면 온갖 부도덕한 짓, 심지어는 살인조차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인물이다. 물론 프랭크에게 정책적 지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묘사되지 않거나 묘사되더라도 단지 서사의 진행을 위해 (거의 대개는 프랭크의 실패를 위해) 건조하게 묘사되는 데 그친다. 프랭크뿐만 아니라 다른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뒤통수 때리기, 줄대기, 딴지 걸기 등등 흔히 '정치질'한다고 표현할 때 그 정치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하오카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진정한 무엇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진 모르겠지만 위 사진처럼 하오카에서는 성조기를 수시로 뒤집는다. 웨스트윙에서 묘사된 '이상적인 미국' 따윈 결코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여간 여러모로 하오카는 웨스트윙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웨스트윙 종영 이후 7년이 흐른 뒤 시작된 드라마라는 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 현상을 분석할 때 주류-엘리트-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의 철저한 불신이 주요한 요인으로 꼽히는데, 어쩌면 하오카가 묘사하는 정치란 바로 그 대중들이 생각하는 미국 정치를 반영한 것 아닐까. 


3.

마지막으로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 2016년 9월 첫 방영한 드라마다. 미국 정부로 구분하면 오바마 2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양당 대선후보가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로 확정된 직후다. 또 조금 무리해서 기획단계까지 감안하면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던 시기일 수도 있겠다. 비교적 최근의 드라마이므로 시놉시스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연두교서 자리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사들이 모조리 사망한다. 남은 인사는 이런 경우에 대비해 안가에 대기시킨 한 사람, 정치에 입문한 적 없지만 도시주택개발부 장관이고 권력승계 순위 최하위라 잉여처럼 '지정생존자'로 지명된 톰 커크먼. 이 사람이 난데없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정치에 뛰어드는 게 이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이다. 



여기서의 정치는 웨스트윙과 하오카의 혼합형에 가깝다. '대부분 진정성이 없지만, 그래도 진정한 무엇은 있다'는 것이다. 진정성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웨스트윙의 시대 다음에 진정한 것이 없다는 하오카의 시대가 왔듯이, 진정한 것이 없다는 하오카의 시대 다음에 그럼에도 진정한 것이 있다는 지정생존자가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변증법적이라고 해도 좋을까. 정치적 라이벌, 또는 주변 관료들은 하오카에 묘사되는 바로 그 정치를 일삼는 자들이지만, 주인공인 톰 커크먼과 그의 부인(이민 전문 변호사다)만은 웨스트윙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다. 시놉시스 설명에도 굳이굳이 적어놓은 것처럼 '정치에 입문한 적 없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점은 많은 걸 시사한다. 톰 커크먼은 정치의 어두운 면모에 오염되지 않은 인물이고, 옳다고 믿는 걸 따르며, 정치적·외교적 형식에 갇히지 않고 창의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영화 <광해>에서 하선이 상징하는 그것을 떠올리면 된다.) 


5.

그래서 가장 맞는 관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답을 내리기 어렵다. 진정성이라는 척도는 계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정성 있는 것이냐'를 묻는 것이 아닌, '어떻게 좋은 정치를 만들 것이냐'다. 이렇게 묻는다면 진정성 있는 정치인을 구매하는 정치 소비의 방식 자체가 옳지 않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음에 적을 말이 아직 많지만, 얼른 웨스트윙 시즌5를 봐야 하므로 여기까지만 적기로 한다. '진정성 신화'에 대해 더 많은 얘기가 궁금하다면 서점에서 『냉소사회』를 구매해 읽으시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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