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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Feb 13. 2017

'평균의 사람들'

구현모씨가 쓴 페이스북 글을 보고 적는다. 링크를 걸려고 했는데 나만보기로 바꿨나보다. 


1.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서울의 이름난 4년제 대학을 나오지 못한/않은, 투표는 국민의 의무라고 믿지만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일베를 경멸하지만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노력하면 적당히 먹고살 수 있다고 믿는, 자신의 분야에서는 구조적인 문제를 이따끔 마주치고 때때로 분노하지만 그 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고민해본 적 없는, 그런 다수의 사람들을. 보편? 일반? 평균? 평범? 보통? 그것이 그저 어떤 상태를 묘사할 뿐이며 어떤 가치지향, 즉 그들을 선(善)으로는 보지 않는 표현을 찾자니, 역시 '평균' 정도가 가장 적당한 것 같다. 나는 위에서 묘사한 것들이 한국 사회의 평균적인 상태이자 인식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선거 여론조사 등에서는 이른바 중도층, 또는 무당파, 모르겠음, 응답하지 않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랄까. 


2.

나는 운좋게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주로 중고등학교 친구들이나 군대 선후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평균의 학력수준을 가진 지역에서 평준화된 고등학교에 다닌 까닭에 내 친구들 중 '서울의 이름난 4년제 대학'을 다니는 사람은 몇 없다. 종종 만나는 친구들 열댓명(신기하게도 성비가 딱 5:5다) 가운데는 한두 명 정도. 군대는 적당히 전방에 위치한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는데 중앙대 정도를 나온 내가 군생활 내내 포대 내 최고 학력자였다. 동료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름 모를 지방대학을 다니다 온 스무살~스물한살의 평균적인 남성들이었다. 고졸한 뒤 왔거나 전문대를 다니다 온 이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알 수 있다는 데 감사하게 생각한다. 서울 중상위권 대학을 나와 활동의 영역에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가령 외고를 나왔거나 고학력자가 많다는 공군에서 근무했다거나 하면 이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잘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다. 


3.

딱 내 시야에 한정해 봤을 때, 이들 중 다수는 페이스북을 안 한다. 시간이 아까워서일 수도 있고, 관심있는 정보들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페이스북의 의미가 '변질'됐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잘 안 한다. 하더라도 눈팅만 한다. 여기는 정말 좁은 세계다. 또 심지어 페이스북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자주 그러듯, 이 사람들은 신문을 거의, 아니 전혀 안 읽는다. 페이스북을 안 하니 인사이트나 위키트리 같은 연성화된 뉴스 페이지조차 접할 일이 없다. 이들이 세상 소식을 접하는 통로는 기껏해야 티비뉴스 정도다. 그마저도 의식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히 채널이 맞춰져서 보는 쪽에 가깝다. 아니면 네이버 모바일 앱 맨 처음에 뜨는 뉴스 제목들 정도를 훑어보는 정도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나 최순실 게이트 정도의 굵직굵직한 사건은 알지만 좀 더 구체적인 소식들에는 깜깜하다. 이들이 SNS를 한다면 주로 인스타그램이다. 아주 일상적인 사진들이 올라온다. 100만, 200만이 모였다는 촛불집회 사진이 이들의 계정에 올라오는 일은 거의 없다. 


4.

이처럼 학력이 낮으니 아직 취업을 못했거나 알바를 전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어딘가 취업한 상태다. 전문대에서 익힌 기술로 전문직종에서 이직을 반복하며 일하고 있거나 핸드폰을 팔거나 보험을 팔거나 네일샵에서 일하거나 작은 동네병원에서 조무사로 근무하고 있다. 카페나 레스토랑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고 있더라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일해와서 지금쯤은 매니저로 승진해 있는 경우다. 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와 갈 수 있는 회사들처럼 높은 월급을 받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기도 한다. 보험 일을 하는 내 친구는 페이스북을 하는데, 매일매일의 성취에 행복해하고, 따로 요청받지 않았더라도 오직 열정으로 '고객님'에게 필요한 정보를 써서 올린다. 고학력자인 나를 만날 때면 나중엔 결국 내가 더 많이 벌게 될 거라면서 부러워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삶을 한심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평균의 사람들이다. 평균 이하의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안수찬 선배가 작성한 <그들과 통하는 길>이라는 글이 가이드가 될 것이다. 


5.

빈곤과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로 논쟁이 오가는 것 같다. 빈곤한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접할 기회가 없다는 말과, 빈곤하지만 페미니즘을 통해 삶을 바꿔가는 여성들이 있다는 말이 양쪽에서 대립한다. 글쎄. 적어도 내가 아는 '평균의 사람들'을 보면, 이건 어떤 기회의 문제라기보다, '이 이슈에 대해 알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가까워 보인다. 심지어는 남성과 여성의 문제도 아니다. 내 여성 친구들은 페미니즘의 용어로 말하자면 '명예남성'일 거다. 개념있는 여성에 대해 자주 얘기하고, 남성들의 무례한 행동들, 예컨대 길거리 번호 따기나 노골적인 플러팅 같은 행동들에 대해서 그다지 불쾌해하지 않는다. 물론 이 친구들도 삶의 현장에서 성추행을 당하거나 직장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하면 불쾌해한다. 하지만 그게 어떤 여성혐오적 구조의 문제라고 인식하거나 페미니즘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스물다섯 이후로 만날 때면 늘 결혼 얘기를 화두에 올리기도 했다. 비혼주의나 가부장제의 문제로서 결혼이 아니다. 언제 결혼할까, 남자친구의 지금 조건이 괜찮을까, 같은 방향의 결혼이다. 재작년과 작년 페미니즘 이슈가 그토록 뜨거웠다고 하지만 내 친구들에게 그 이슈가 얼마나 와닿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의 페미니즘 담론을 깎아내리려고 쓰는 글이 아님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들도 페미니스트가 되어주길 바란다. 지금 논쟁의 축이 페미니즘 이슈라서 페미니즘에 한정해서 얘기했을 뿐이다. 그 외의 거의 대부분의 사회 이슈에 대해서 마찬가지다. 딱 주류 미디어가 발전해온 수준으로만 그것들을 이해한다. 예컨대 성소수자에 대해서 "뭐 어때" 정도의 시각을 가진다. 여성혐오의 문제도 딱 주류 미디어의 수준만큼으로 바라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주류 미디어가 사회적 이슈들을 성실하게 다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6.

담론에 대한 접근이 '이 담론에 대해 알고 있느냐 아니냐', 즉 실체적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메갈리아의 출현은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메갈리아 이전까지 인터넷은 남성 주류의 커뮤니티와 유머코드가 주를 이뤘고, 여기에서 여성은 오직 객체로만 존재했다. 메갈리아의 등장으로 많은 여성들이 어떤 언어와 내용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게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어떤 접근의 가능성이 생긴다. 이에 관해서는 재작년 11월에 적어둔 토막글을 다시 옮겨본다.


"메갈리아의 의의는 그 동안 운동에 참여하지 않던 여성들이 메갈리아를 매개로 대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데 있다, 고 추정한다. 메르스갤러리저장소 댓글을 볼 때도 느꼈고, 이번에 메갈리아에 대해 쓴 글들이 나름 뻗어나가면서 그곳 이용자들로 추정되는 분들과 친구가 많이 되면서 느꼈다. 내가 페친이 1200명인데 그들 다수와 나 사이의 '함께 아는 친구'가 많아야 세 명 이하더라. 함께 아는 친구로 나오는 이들도 페미니즘 활동가로 분류(?)할 이들은 대체로 아니었다. 타임라인을 훑어보면 사회적 이슈들에 크게 관심이 있는 이들도 아니다. 굉장히 거칠게 예상해보건대 메갈리아를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들은 기존의 페미니즘 활동과 거리가 멀었던 이들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보자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에 비하면 메갈리아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들이 뭐가 그리 대수냐 싶기도 하다."


7.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어떻게 노동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를, 성소수자의 문제를, 장애인의 문제를, 인종의 문제를, 정치개혁의 문제를 설득할 것인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의 방식, '우리는 우리끼리 앞서갈 것이고,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므로 네가 따라와야 한다'는 방식은 적어도 내 친구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냥 경험적으로 아는 건, 이들은 나를 통해 이런 이슈들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이러한 주제들을 열심히 올리는 편이고, 내 친구들은 내 SNS에서 그 주제들을 접하게 된다. 꼼꼼히 읽는 것 같진 않다. '아, 이런 게 있나보다' 정도. 날 만났을 때 "너 요즘도 거리에서 시위해?", "세월호 어떻게 돼가?", "야, 쟤 왔잖아 그런 말(예컨대 여성혐오성 발언) 그만해" 같은 말들을 하는 걸 보면 날 매개로 무언가를 인식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 친구들은 날 좋아하는 편이고,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이슈들에 대해서도 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고, 자기들이 하지 않을/못할 일에 뛰어든 사람인 걸 안다, 쟤가 뭘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응원한다.' 대충 이런 정도의 느낌으로 나를 대한다. 날 좋아하니, 내가 하는 일들도 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중요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송곳>에 나오는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라는 말을 싫어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로서는 이 말만큼 옳게 여기는 말이 없다.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 그의 말을 들었고,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말을 들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8.

그러나 이 모든 얘기는 어디까지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 차원의 얘기다. 예컨대 한국 사회의 평균적인 수준의 여성혐오를 일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말을 마주하는 어떤 여성이 그 사람마저도 포섭의 대상으로 여겨 배려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 혐오자를 만났을 때 성소수자가, 장애인 차별주의자를 만났을 때 장애인이 그러할 필요는 없다. 나는 누군가 자신의 정체성을 공격할 때 그마저도 포섭하려 드는 사람을 매우 존경하겠지만, 누구나 그런 수준의 인내를 감내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운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도 잘 안다. 남성-페미니스트가 평균적인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그가 여성이라면 더더욱)을 만났을 때, 이성애자가 평균적인 수준의 성소수자 혐오자를 만났을 때, 비장애인이 평균적인 수준의 장애인 차별주의자를 만났을 때, 그가 왜 그런 사람이 됐는지 이해(understanding)하기에 앞서 조롱하거나 배제하려 드는 상황에 대한 얘기다. 


9.

평균을 넘어 평균 이하의 혐오를 일삼는 이들까지도 포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평균 이하나, 평균 이상이나 모두 수적 소수인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건 평균에 머무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사회의 균형추를 평균 이상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제도정치와 마찬가지 원리다. 다수의 중도층, 무응답 층을 움직이는 사람이 당선된다. 결국 우리는 평균에 머무는 사람들을 이끌고 와야만 사회 전체의 수준을 상승시킬 수 있다. 하지만 평균에 머무는 사람들을 끌어올리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제도적으로는 상승할 수 있어도, 문화적으로는 끊임없이 공회전하고 말 것이다. 언제든 반동이 이뤄질 수 있는 상태. 평균 이상인 사람이 다수가 되고 평균 이하인 사람들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평균 이하인 사람들은 알아서 진화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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